내가 보내는 신호 알아차리기

aka 나와의 화해[2]

by 이음언니

결혼을 하고도 수 년이 지났고 아이까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 생각하면 안된다고 할 수록 그가 더욱 떠올랐다.


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여느 신입생이 그렇듯 다양한 그룹에서 선배들이 불러주는 술자리에 끼었다. 풋풋한 신입생 여자아이가 하는 이야기에 모두들 주목해 주었고 웃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도 너그럽게 웃어주는 선배들이었다. 그 당시 나는 연달아 성취를 경험했던 터라 다소 거침이 없었고 행운은 내 편이라 생각이 들어 경거망동도 일삼던 시기였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고 천둥벌거숭이같은 나와 달리 매사에 신중하고 차분했고 말을 아끼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의 물음은 다소 어이없었다. 아니 알만한 사람이 무슨 이런 시덥잖은 질문을 하는가.

"그거야 당연히 내가 능력이 출중하니까 하고 싶은걸 다 할 수 있는거지."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내게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하고 싶은걸 다 할 수 있었던 건 네가 다 할 수 있도록 뒤에서 희생해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야."

그 얘기는 내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여지껏 내가 다 잘나서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심지어 우리 엄마는 나한테 뭐든 다 잘한다고 얘기해준 사람이었는데 실은 내가 다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그냥 잘 한다고 말해줬다는 것인가?

상처받기 싫어 내가 먼저 내뱉은 헤어지자는 말은 그에게는 그저 호수에 떨어진 돌이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는 나의 미성숙함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실수들을 마치 내 보호자처럼 교정해 주었다. 그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종종 아리송했다. 그 아리송함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아리송함은 결국 관계의 퍼즐조각이었고 나는 더 이상 그 조각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끝이 났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보고 싶을 이유가 뭐가 있을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상에서 파는 떡볶이 사먹는 걸 좋아하는 나한테 귀한 사람이 귀한 음식 먹어야 한다고 TGIF에 데려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떡볶이가 더 맛있다. 그런데 지금은 떡볶이를 파는 노점만 봐도 그가 떠올랐고 심지어는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그를 만나러 가겠다는 용단을 내렸다.


로버트 A. 존슨, 제리 룰이 쓴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라는 책에서 알게된 칼 융의 적극적 상상이었다. 그가 자꾸 생각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원초적 무의식이 발동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를 만나러 가기위해 가장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었고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그를 만나는 장소는 내가 20여년을 살았던 동네 근처의 대공원이었다. 가는 길은 꽤 설레었다. 날씨는 매우 청량했고 나의 마음은 점차 들떴다.


그리고 그를 곧 보게 되었다.


그를 만난 순간 그와 함께 경험했던 부정적인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불쾌함과 답답함은 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모든 시간들을 뒤집고도 남을만한 큰 에너지였다. 꽤 오랜시간 그가 떠올랐고 보고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보자마자 압도되는 부정적인 감정에 당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적극적 상상을 통해 그를 만났는데 너무 기쁘기까지 했다면 현실에서의 나는 어찌해야 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니었어. 그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어.

나는 곧장 뒤를 돌아 나왔다. 대공원 입구 쪽에 위치한 화장실 유리문에 비친 나를 보았다. 거기에는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명랑했던 내가 있었다. 거침없었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내가 지금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의 나는 수행해야 하는 많은 역할들에 갇혀서 꿈뻑 꿈뻑 숨만 쉬는 어항 속 물고기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너였구나. 내가 보고 싶었던 게.
그리웠구나. 그때의 치기 어린 미성숙함마저도.'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부터는 그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나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나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내 상황이야 어떻든 나는 역할들을 수행해야 했다. 수행하는 과정을 묵상할 겨를은 없었다. 과정은 그저 결과를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반복되는 행위들은 시지프스의 형벌 같았다. 이 반복됨은 결국 죽어야 끝나는 거였다. 그런 사상이 나를 지배했을 때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과거의 자유로웠던 나였다. 그러나 이제 어쩌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 벌려놓은 삶의 무게들은 젖은 담요마냥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대공원에서 어린 나와 조우한 이후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는 혈기가 왕성해서 무엇이든 도전했다면 지금은 한정된 에너지를 어느 곳에 써야 할 지 아는 지혜가 생기지 않았니?'

'그때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이제는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배우지 않았니?'

'그때는 액체같은 불안정성이라 나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이제는 고체와 같은 형체가 생겨 너의 형체에 기대는 사람이 있을 만큼 힘이 생기지 않았니?'


그리고는 곧 나를 위로하였다.

'네가 그 시절의 너를 그리워할 만큼 지금이 많이 힘들구나. 돌아가는 일상에서 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네가 훨씬 더 중요해. 그러니 지금의 너를 보살피자.'


자칫하면 내가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엄한 일을 벌릴 뻔 했다. 내면에서 이뤄지는 나와의 소통 덕분에 내가 보내는 신호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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