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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치 Jan 30. 2023

나에게로의 여행

매섭도록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오랜만에 카페에서 책이나 읽을까 하는 생각에 두어 시간 일찍 약속장소가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모퉁이에는 처음 보는 이름의 작은 카페가 있었다. 평소라면 고민 없이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좋아하는 카페에 갔을 테지만 그날따라 낯선 그 문을 열고 싶었다.

달칵하고 열린 문 너머에는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남은 곳은 바 테이블뿐이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이 깔린 카페의 스피커에서는 가끔 제이가 집에서 듣곤 했던 영화 러브레터의 삽입곡 <Sweet memorie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익숙한 멜로디에 발걸음을 붙들려 카운터석과 길게 연결된 바 자리에 앉았다.


음악에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드립커피를 홀짝이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니 금세 커피잔의 바닥이 드러났다. 두 번째 잔은 커피가 아닌 위스키로 시켰다. 바에서 바로 보이는 카운터 쪽의 벽면에 줄지어 늘어선 위스키병들이 유혹을 한 것도 있지만 혼자만의 시간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왜 간절하게 서로 연결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홀로 있고 싶어 하는 것일까.


2017년 가을,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훌쩍 교토로 떠났다. 2주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여행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당시 다녔던 회사는 별명이 ‘디자인계의 공기업’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디자인회사 치고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5년 가까이 근속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회사 맞춤형 인간으로 재단되어 있었다. ‘독립적이고 개성 있는 취향의 나’라는 사람은 점점 옅어지고 회사원 아무개로 살던 나는 앞머리를 자를까 말까 하는 사소한 결정 하나 혼자서 못하는 우유부단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지금은 시도도 못할 총천연색으로 가득했던 옷장이 온통 무채색으로 변해있던 것을 깨달은 날 퇴사를 결심했다.


가는 걸음마다 낯선 풍경이 펼쳐졌고 언어는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서툴렀던 일본어로는 점원들과 띄엄띄엄 주문을 하거나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숙소로 고른 에어비앤비는 복층침대와 작은 테이블이 있는 원룸으로 관광객들이 오가는 큰길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주택가에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오래된 목욕탕이 있었는데 겉보기에도 낡고 일상적인 건물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하고 싶은 것은 많고 해야 할 것은 없었기에 여행 전에 구글 맵에 잔뜩 저장해 놓은 장소들을 펼쳐놓고 매일 행복한 고민을 했다. 오늘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또 무얼 먹고 싶은지. 매 순간 던지는 질문은 오직 나에게만 건네는 대화였다.


2주 간의 여행에서도 유난히 혼자가 된 날을 기억한다. 친구가 1박 2일의 짬을 내서 다녀간 바로 다음날이었는데 새벽부터 일어나 친구를 역으로 태워 보내고 나니 불현듯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와 다시 잠들었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자 점심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풍경을 벗 삼아 걸어서 도착한 <야마모토 멘조>에서 소고기연근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헤이안신궁을 지나 세이코샤 서점을 찾은 어느 가을날. 꼭 들르고 싶던 서점 중 하나였던 세이코샤에서 매대를 한참 둘러보다가 만지작거리던 책과 서점 안에서 청음한 모르는 가수의 CD를 사서 돌아왔다. 그날의 모든 것과 어울리는 음악이 담긴 앨범이었다. 혼자임을 오롯이 느끼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털레털레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오며 느낀 온전한 만족과 황홀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후로도 이어진 며칠 여의 시간 동안 나와의 여행을 만끽했다. 하나 둘 좋아하는 것들을 찾을수록 잃어버렸던 색들을 찾는 기분이었다.

당시에는 여행의 기억이 좋았던 이유가 교토라는 여행지가 매력적이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돌이켜보니 교토라는 도시보다 내 안에 크게 남아있는 것은 거리를 하염없이 거닐었던 나의 마음이더라.


여행에서 돌아온 뒤, 세이코샤에서 샀던 앨범에 ‘2017년 나의 교토’라는 이름을 덧입혔다. 여전히 그 앨범을 들으면 교토의 거리를 헤매던 날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쩌면 여행이란 낯선 동네를 나의 기억을 입혀 다시 그리는 일이 아닐까.


카페 마감시간이 되어 읽고 있던 책과 벗어놨던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골목을 나와 걷자 분명 익숙한 동네인데 낯선 냄새가 훅 느껴졌다. 은은하게 남은 취기가 찬 바람에 달아나며 코끝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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