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과 차악의 어딘가에서
영국이 유럽연합을 공식적으로 나가기로 하면서 영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더욱 증폭됐다. 특히 이념론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영국의 향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우려 섞인 시선이 즐비했다. 동시에 영국이 근대 이후 가장 강력했던 최초의 제국을 구축했던 국가에서 수에즈 위기와 유럽연합 탈퇴를 통해 더 뒷방으로 밀려나는 선택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유럽을 엄습하면서 유럽이 비상에 빠졌다. 유럽이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선진국들 모두 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하지 못했으며, 유럽연합에서 (3년이라는 민폐를 부린 끝에) 탈퇴한 영국도 바이러스 감염자가 크게 늘었다. 치솟는 확진자를 유럽은 좀처럼 제어하지 못했으며,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까지 격리에 돌입했다. 심지어 존슨 총리는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위중한 상황까지 전개됐다. 메르켈 총리와 존슨 총리는 무사하며, 존슨 총리는 회복하면서 다시 영국을 이끌고 있다.
영국이 총리 확진을 피하지 못한 사이 유럽은 코로나바이러스 대확산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이탈리아에서 대유행이 시작된 가운데 독일, 프랑스, 스페인까지 인접국들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영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일제히 이동제한을 통해 확산 방지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도시를 대거 폐쇄했다. 심지어 보건 당국에 비상이 걸리면서 각 국의 경제가 크게 내려앉았다. 이로 인해 유럽통합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제기된 가운데 영국이 탈퇴 이후 긍정적인 요인을 찾을 여지를 작게나마 찾게 됐다.
기존 유럽의 경제가 크게 내려앉을 경우 유럽 국가들과 교역량이 많은 영국에게 큰 비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경제사회적 통합의 결정체인 쉥겐조약이 전염병 창궐이라는 중차대한 첫 위기를 마주하면서 영국의 탈퇴에 아주 작은 당위성(?)이 생겼다. 물론 영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일 때도 쉥겐조약에서 예외적이었다. 물론 영국의 EU에서 특별한 위치를 감안하면, 탈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익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역내 통합에 일정 부분 제동이 걸린데다 각국의 경제가 비상시국에 빠져든 가운데, 영국이 회원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유럽연합에 납부해야 하는 공여금이 생기는 만큼, 이참에 빠지기로 선택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된 셈이다.
EU라는 큰 배에서 하선할 때만 하더라도 영국이라는 상대적인 작은 배는 이후 엄청난 파도와 마주할 가능성이 실로 높았다. 통상 교역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향후 체결해 나가면 그만이지만, 영국은 유럽연합과 미국의 다리로서 정치적인 역할도 적지 않았으나 이를 버리면서 자신의 몸값을 떨어트렸다. 즉, 국제정치의 1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것만 보더라도 영국이라는 배가 격량에 휩쓸리거나 영향력 감소로 더는 국제무대에서 이전과 같은 역할을 하긴 쉽지 않아졌다. 그러나 전염병 확산으로 인해 유럽연합이라는 큰 선박이 빙하와 마주한 사이 영국은 빙하 틈을 타 알게 모르게 빙하를 지나갔다.
영국의 상황이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탈퇴 당시만 하더라도 긍정적인 부분이 하나도 없었지만, 뜻하지 않은 세계적인 위기로 말미암아 영국이 헤쳐나갈 여지를 마련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정국 이후 유럽연합이 전 회원국은 물론 EU 권역의 정비에 나서야 하는 부분을 고려하면, 정상화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회원국들이 우선 정상화되어야 유럽연합이 보다 이전처럼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EU에 있을 때도 상대적으로 자국 중심이었지만) 이제 오롯하게 자국만 신경쓰면 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됐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유럽통합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브렉시트는 영국에게 알게 모르게 또 다른 기회가 되고 있다. 유럽연합이 깨진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겠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쉥겐조약 개정이 대두되거나 기존 회원국들의 통합의지가 상대적으로 줄어들 가능성도 높다. 반면, 영국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새로운 선택으로 인해 유럽이 마주한 불확실성과는 덜 무거워 보이면서 결이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될 예정이다. 즉, 코로나바이러스와 브렉시트가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엇갈리면서, "인생은 모른다"는 말이 새삼 크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