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조금 반짝이는 단어처럼 들리는 것 같다.
이중언어, 이중문화.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사람들.
공익광고 속 아이들은 또렷한 발음으로 인사를 하고, 책 속의 문장은 수많은 가능성을 늘어놓았다.
경계에 서 있지만,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가진 존재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문장들을 꽤 오래 믿었다.
하지만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디 아파?”
고개를 끄덕인다.
“배야?”
이번에는 고개를 젓는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의 전부였다.
이름을 불러도 눈을 잠깐 마주쳤다가 피한다.
질문을 하면, 답 대신 아주 작은 표정 하나가 지나간다.
사람들은 쉽게 물었다.
“그럼 다른 언어는 잘하겠네?”
그 말은 사실 질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문장에 가까워 보인다.
'너는 그럴 것 같아. 그래야 할 것 같아.'
그 말속에는 이 아이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는 없다.
실제로 내가 만난 아이들은 두 개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느 하나의 언어도 완전히 자기 것이 아닌 상태에 가까웠다.
한국어는 아직 낯설고, 집에서 쓰는 언어는 더 낯설다.
부모와 나누는 말은 짧고, 친구들과 나누는 말도 조심스럽다.
말은 입 안에서 자꾸만 맴돌다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 아이에게 언어는 도구라기보다 넘어야 할 무언가에 가까워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결과를 먼저 배우고, 과정은 나중에 본다.
이중언어를 하는 사람들. 두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
그 문장에는 얼마나 오래 침묵했는지, 수없이 많은 날에 어떤 말을 삼켰는지, 얼마나 자주 틀렸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그저 잘하게 된 이후의 모습만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아이들은 두 개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두 언어 사이에서 아직 다리를 놓고 있는 사람들 아닐까.
어디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한 발을 들고 조금 오래 서 있는 상태.
그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지루하다는 걸 우리는 잘 모른다.
어느 날은 그 아이가 아주 짧은 문장을 말했다.
정확하지 않았고, 문장은 조금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말이란 건 잘하는 순간보다 처음 꺼내는 순간이 더 어렵다는 걸 그때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묻지 않는다.
"베트남어 잘해?"
대신 기다린다.
이 아이가 어떤 언어로든 자기 말을 꺼낼 수 있는 순간을.
그게 한국어든, 어느 나라의 말이든, 혹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방식이든.
어쩌면 언어는 두 개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편안하게 쓸 수 있게 되는 일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도 교실에는 말보다 먼저 자라는 것들이 있다는 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