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잔치

by 고양이

시간이 남아 그 공간이 공허해지면 나는 가끔 아무에게나 전화를 건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에게 나가 아니라 휴대폰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름에게.

이유는 없다. 그저 시간이 조금 비어 있고 그 빈 시간이 나를 가볍게 밀어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는 길게 울리지 않았다.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받거나 받지 못했을 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온다.

그렇게 연결되면 전화를 걸은 건 내쪽인데 대화의 시작은 항상 상대방이었다.


“나 지금 좀 엉망이야.”


맥락 없는 말에 답할 의지를 잃었다.


“엉망이어도 살 수 있을까?”


그러면 그쪽에서 다시 말한다.


“엉망이 아닌 사람보다 조금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너는.”

굳이 정리해 주거나 고치지 않고 그냥 그 말 그대로 둔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말을 좋아했던 것 같다.


“너 때문에 그래.”

“네가 엉망이라서 그래.”


이런 말보다


“나 좀 엉망인 것 같아.”


이런 말.


누군가가 자신의 쪽으로 책임을 가져오는 말.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 고백 같은 말.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조금 편해진다.

서로를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기 너머로 늘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오늘 먹은 것, 길에서 본 것, 갑자기 떠오른 기억 같은 것들.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아무 말 잔치가 끝나면 남는 게 없다.


후련하게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특별한 말이 아니라 말이 특별해질 필요도 없는 시간.

어쩌면 그런 시간 덕분에 엉망인 채로도 조금 더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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