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만의 행복을 반복합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유난히 9월과 10월 사이에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들끓던 계절의 모든 풍경은 식어가는데 까닭도 없이 나는 다시 살아나는 기분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더 멀리 가고 싶고 더 많은 것들을 만나고 싶다. 내 주위를 치장하기 위한 물질적 풍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로 살아가는 일을 한번 더 깊이 인정하고 더는 어찌할 필요도 없이 이대로 사는 나를 선명하게 마주하고 싶다.
오래전에 S대 벤치에 앉아 이제 어디로 이동할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H는 내게 행복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당시 그런 질문을 불쑥 던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나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단박에 손에 들고 있던던 컵을 들어 올리며 "아이스 라떼!"라고 답해버렸다.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게 행복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그 사람에게 긴 설명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게 내가 나의 행복을 혼자서 정의하는 첫 타이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금도 누가 묻든 나의 행복은 아이스 라떼라고 답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조금 긴 설명도 붙일 것이다. 나는 언제든 고소한 아이스 라떼를 손에 쥘 수만 있다면 내게 꼭 맞는 편안함에 곧장 도착할 수 있다. 이상하리만큼 정말 편안해진다. 그래서 나에게 행복이란 편안함이야, 라고 마음대로 규정하기로 했다. 숱한 수식어와 조건을 모조리 차치하고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행복한 것이라고. 그래서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든 지금 잠시라도 편안하다면 "행복하네"라고 말하기로 했다. 이처럼 행복을 내가 좋아하는 어떤 감각으로 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어렵지 않게 더 많은 편안함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여러 오류들이 일어났지만 그 끝에 몇 가지 단단한 편안함을 추릴 수 있게 됐다.
나는 고소한 아이스 라떼를 마실 때 편안해
나는 내 방에서 책을 고르고 읽을 때 편안해
나는 좋아하는 옷을 손빨래 하고 옷걸이에 걸 때 편안해
나는 현금을 조금 챙겨서 절에 갈 때 편안해
나는 김동률 콘서트에 가고 노래를 들을 때 편안해
나는 좋은 재료를 쓰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고를 때 편안해
나는 지금 편안해
편안함에 안착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방법을 플레이리스트처럼 담아 놓고 수시로 써먹는다. 내게 안 좋은 것을 단숨에 끊고 유혹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매일의 마음이 수행이듯 내게 좋은 것을 미루지 않고 해주는 것도 마음을 맑게 닦아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혼자서 하기 쉽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내게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아무 말을 해도 좋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사이는 사실 "OO년째 친구" 같은 시간의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살다가 만나는 인연 중에는 그냥 그렇게 되는 사이가 있으니 그런 사이를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일에 마음을 쓰는 게 중요하다. 이성 역시 누군가는 가슴이 뛰거나 후광을 보기도 한다고 하던데 나는 첫 만남에도 무조건 편안함이 먼저다. 몇 해를 봤음에도 무엇을 해도 끝까지 편안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드물어서 문제지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불편한 자리에서라도 같이 있음에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대책 없이 마음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남들이 말하는 설렘이 나에게는 강렬한 편안함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편안하다" 라고 직접 말하는 것은 결코 흔한 말로 치워둘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특별한 고백과도 같다.
새 가을이 다시 오고 있다. 그러면 나는 또 불현듯 잘 살고 싶다는 생각에 완전히 입수해 버리고 말 것이다. 혼자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던 편안함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서 나만의 풍요에서 유영하게 되겠지. 여전히 나로 살며 편안함에 이르는 길을 잘 닦고 싶다. 이 방법들을 언제까지 써먹을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 모든 편안함들이 시시해지고 행복을 다르게 정의하고 싶어질 때가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라도 나는 나를 잘 챙겨서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