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

내가 작년에 이걸 해봤던가

by 윤나다




시간이 빠르다는 자각의 단위가 예전만 해도 한 달 정도였는데 이제 열두 달이 흘러가는 게 우습게 됐다. 얼마 전 친구와 호텔 체크인을 기다리다가 "우리 얼마 만에 본거지?"라는 질문에 눈부터 질끈 감았다. 아마도 우리 둘 다 긴팔 입고 만난 것 같진 않은데 라는 나만의 잔상 기억법을 펼쳐서 시간을 쭉쭉 감아보니 초복 전에 만났던 게 생각났다. 반년 전이다. 이번 초복에도 여느 해와 같이 어복쟁반을 먹어야 한다며 여러 번의 안녕 끝에 헤어졌던 잠실역까지 다 떠올랐다. 그 사이 두 계절 내리 커피 한잔하지 못하고 보낸 우리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서 있게 됐다. 뭐하고 살았지 라는 생각으로 어설피 쓸려 가기 전에 눈을 반짝반짝 굴리며 절반의 오후를 채울 소소한 계획이나 짜보기로 했다.


5년 정도 한 해의 시작을 일출 산행으로 열었던 시기가 있었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새벽부터 깨어나 간식을 손질하고 있으면 새해 모든 날에 정성을 쏟고 싶은 마음이 빳빳하게 준비되는 기분이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로 만차가 된 버스를 한두 번 보내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하산 후에 할 일을 골라 보기도 했다. 점차 밝아지는 사위에 발등이 훤해져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내 뒤를 쉼도 없이 밀며 올라오는 이들이 한눈에 잡혔다.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뜨는 저 해를 향해 오르는 마음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아니 무엇을 쓸 건지 묻고 싶었다.


나의 새해 목표는 언제나 딱 하나로 정리된다. '작년에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다. 이 한 줄은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오래전에 마음에 각인되어서 몇 갈래의 선택 앞에 놓이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고민의 무게를 빨리 덜어주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작년에 하지 않았다면 가볍게 해보는 쪽으로, 작년의 나와 다른 내가 되는 방향이라면 기꺼이 가는 걸로 결정하는 것이다. 수시로 작년의 나와 견주어 보며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추린다. 한 해 동안 내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언제나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서 조금 싱겁거나 시시한 일이 대부분일 때도 있었지만 인생의 어떤 구간을 채우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살면서 그때만 할 수 있는 일, 오직 그때라서 열심히 해볼 수 있었던 일들을 나의 역량만큼 해봤다는 거니까. 8년 전 어느 한 겨울에 해인사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떠난 일, 일출 산행을 해보기로 한 마음, 여러 대회에 참여하고 싶게 만든 10K 달리기의 시작 등 내 행위의 스타트 라인에는 언제나 그 한 줄이 쓰여져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새해가 오는 이쯤이면 떠올리게 된다.


올해 도달한 지점 중 하나는 신춘문예가 있었다. 작년에 안 해본 일을 따지기도 전에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으니 접수까지 막힘 없이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먼저 수상한 작품을 찾아보느라 문장 하나 완주하지 못하고 반나절을 날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엔 이런 과정도 없이 꼿꼿해진 마음의 강도에 단번에 눌려버린 걸 보면 작년과 달리 어지간히 뭔가를 쓰고 싶었거나 이제는 나와 다툴 기세도 없이 늙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해보겠다고 한 일에 끝은 보는지라 일정에 맞춰 마무리된 원고를 들고 아침 일찍 우체국에 갔다. 원고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봉투에 주소를 쓰려고 하니 가까이 있던 직원 한분이 우람하게 서 있는 자동 기기를 소개해주는 게 아닌가.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주소는 모두 손가락 두 개 정도의 스티커로 완성되어 출력됐다. 손 글씨 쓸 일 없는 세상인 걸 깜박했다. 그래도 내 손으로 마무리 할 일 하나가 있었다. 봉투 겉면에 빨간 글씨로 <신춘문예 공모 작품>이라고 쓰는 것. 한동안 신춘문예로 기울던 마음을 잠시 거두겠다는 붉은 끝맺음, 지장과 같은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썼다. 생각해보니 '예'를 쓰면서 약간 떨기도 했던 것 같고.


사는 모양이 굳을 대로 굳어져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줄거나 인생에 찾아오는 변수와 변화에 무신경해지면 시간에 대한 감각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날이 그날 같고 그 맛이 그 맛 같다는 생각에 잠식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낯설게 만들려는 시도, 그것이 '작년에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돌아온 계절, '작년에 하지 않은 것을 하기'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온다. 차가운 공기로 무장한 겨울 바다 앞이면 좋겠는데. 아아 언제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