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찾아오는 혼자서도 잘 놀아야 하는 시기
각자의 집에서 떨어진 동네로 또는 더 먼 동네로 또래 친구들과 몰려 다니던 시절이 저물고 나면 반드시 홀로 좁은 길목으로 접어들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대단한 서사가 생겨서 주변 관계가 정리됐다거나 자발적인 고립을 했던 것은 아니고 각자 먹고사는 시절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일상에는 나랑 놀아야 하는 저녁이 늘어나고 직면하게 되는 외로움의 수위는 자주 변동된다. 어느 날에는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진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해결되고 친구들과 휘젓고 다니던 번화가를 홀로 걷다가 세일 중인 폼 클렌징 하나라도 사면 대충 때운 식사처럼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벗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때때로 혹은 자주 더부룩한 상태를 알아서 달래고 이제 정말로 혼자서도 잘 놀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목적지가 없는 퇴근길에는 지하철역과 연결된 서점으로 즉흥적으로 흘러 들어갔다. 특히 시가 모여있는 곳에 자주 서 있었다. 눈이 가는 시집을 꺼내서 막상 시는 후루룩 넘겨 보고 앞면을 들춰 '시인의 말'을 손끝으로 읽었다. 시인이 고른 몇 개의 단어는 내 손끝에 튕겨 툭툭 튀어 올랐다. 그 단어들은 내가 종일 써보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긴 업무에 빡빡하게 싸여 있던 몸을 한순간에 풀어주곤 했다. 그러면 종일 모니터 앞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느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퇴근길에 건져 올린 단어와 표현을 들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은 1시간 전 집으로 향하던 마음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새 장난감을 두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처럼.
그러다가 어느 계절에는 재즈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인된 '재즈 댄스'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마침 회사 근처에 학원이 있었다. 잘 알지는 못해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근사한 재즈 음악과 낮은 조도 아래 유연하게 이어지는 움직임을 기대하며 수업에 들어갔다. 당시 수업은 총 2부로 구성되었는데 초반 20분은 느린 템포의 음악과 함께 스트레칭 수준의 동작을 배웠고 나머지 40분 동안 템포가 빨라진 음악을 따라 숨이 찰 정도로 춤을 추는 나를 거울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처럼 근사한 몸짓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거울에 비친 여러 사람 사이로 내가 나를 지켜보며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 습관적으로 올라가 있는 왼쪽 어깨를 거울을 보며 바로 잡고 하나씩 배우느라 뚝뚝 끊어지던 동작이 음악을 타고 춤이 되어 자연스럽게 흐를 때 그 4분 동안은 내 모든 움직임에 기분 좋게 취한 것처럼 거울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리고 6개월이 넘어갈 무렵 지독히 춥던 겨울날, 학원 앞 8차선 횡단보도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치료만 끝나면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인생은 언제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회사까지 옮기게 됐다. 재즈 댄스는 잊었다. 새로운 동네에서 다시 짱짱해진 무릎으로 조금 더 알게 된 나를 데리고 다니며 놀아야 했으므로.
춤은 다 잊어버렸는데 지금도 윤종신의 '이별의 온도'만 들으면 우측에 조명 하나만 켜두고 종일 굳었던 몸을 느리게 쓰며 풀던 공간이 생각난다. 거울을 통해 나의 발끝까지 지켜보며 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읽었던 시간이 이 노래와 함께 몸에 기억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그 기억은 선명하지 않아도 여전히 따뜻하다. 그 따뜻함은 세상의 온갖 유행과 분간 없이 흡수하기도 했던 친구들의 취향 속에 가려져 있던 '나'를 헤치고 새로운 시기를 향해 나아갔던 시간으로 풀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