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알아서 합니다

이걸 해야 내가 살아

by 윤나다




약속이 있는 날이 아니고서야 나는 대개 밤 9시쯤이면 바디 오일을 바르고 있다. 할 일을 다 치른 하루의 끝과 그래봤자 결국 나로 존재함을 확인하는 시작이 미끌거리는 오일을 바르는 손길에서 교차된다. 차분하게 번지는 향에 취한듯이 무상한 표정으로 반복된 행위를 한다. 모든 것이 깊이 스며들 때까지. 내일 해도 될 일만 남은 이 시간은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 문득 알아차리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손바닥을 비빈다. 더는 남은 것이 없음을 확인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하는 일종의 성실함은 내게 무엇을 남기려는가.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확인, 그럭저럭 잘 지낸다는 안부, 내일도 이 시간에 무사하게 있자는 약속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루틴이란 것에 나를 자주 끼워 맞추다 보면 어쨌거나 안정에 가까운 쪽으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잘 살았나? 지금 나는 괜찮은가? 내일 일은 어쩌지? 하는 불안에서 비켜난 곳에 잠시라도 서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내게 밤 9시는 굳은 표정을 다 풀고 무탈한 모습으로 도착하고 싶은 곳이다.


답답한 일이 생기면 물가로 간다. 사주에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건만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갈급해질 때면 물을 찾는다. 마냥 그 앞에 놓여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려간다. 잘해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은 일과 사람으로 뻣뻣해진 머리를 물가에 바짝 대고 서서 적시면 꼬인 내 마음마저 풀어헤칠 수 있다. 덮어두고 싶은 기억들이 물을 잔뜩 먹고 완전히 잠겨가기를 기다리며 근처를 돈다. 걷는다. 앉아 있다. 그럼 나는 되려 바짝 마른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가진 건 시간뿐이니 바다나 실컷 보자고 하던 때가 있었다. 목적지 없이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는 길 내내 한 일이라고는 이름도 모를 바닷가에 자주 내려서 "바다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심심한 말이 거듭될수록 마음이 느슨해져 속초를 넘었을 때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바깥에 내걸어둘 마음이란 없으니 이제 익숙한 동네로 방향을 돌리자고 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게 물은 뻑뻑해진 마음을 알아서 풀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하는 자리가 됐다.


나의 괴로운 구석을 알아서 달래는 방법 몇 가지를 비축하고 사는 것은 의외로 든든하고 효과도 좋다. 그 방법들이 사실은 얻어걸린 게 대부분이지만. 그냥 좋아서, 심심해서 해본 일이 결과적으로 나를 괜찮게 만들면 왠지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나아지려고 힘들이지 않고도 괜찮아질 수 있으니 반복해본다. 이게 정말 내 방법이 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축축해진 마음을 잘 말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든 이 감정만은 내가 처리를 해야 끝나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도 온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던 몇 가지 행위들을 상기한다. 그냥 또 해본다. 지금 저 호수를 찾아가고 있는 내 발걸음이 여전히 유효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