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질문이 나를 삼키려고 할 때

적당히 웃고 넘어가면 선도 넘는다니까

by 윤나다





내 인생에서 생략된 메뉴가 있다면 술이다. 아빠를 닮아 술 몇 모금에 심장이 달음박질을 시작하고 순식간에 발가락까지 벌겋게 달아오른다. 체질상 맞지도 않는 것을 꾸역꾸역 내 몸에 넣을 생각도 없고 술이 건전한 달리기도 아닌데 체력과 돈을 써가며 늘려나갈 이유도 없었다. 술을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 타고난 몸을 따라 인생이 이렇게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 술 잘 마시는 사람에 대한 동경도 없거니와 고민이 있을 때 술을 찾지도 않는다. 술 말고도 나를 구하고 위로하는 것들은 이미 여러 방향으로 준비되어 있었기에. 하지만 사실 술보다 속을 거북하게 만드는 상황이 연거푸 나를 어지럽게 했다. 맞다. 술은 잘못이 없다. 주량을 뽐내며 인생의 재미를 운운하는 이들은 술 못 마시는 내 인생을 쉽게 재단했다. 술에 관한 나의 기호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마시다 보면 코딱지만 한 나의 주량이 늘어날 거라며 고약하게 잔이 넘치도록 채우는 사람과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말할 수 있겠냐고 조소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어지는 불쾌한 질문은 대학생, 취준생, 사회 초년생 등을 거치는 중에도 타인에 대한 존중도 인정도 없이 흔해빠진 안주처럼 어디에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적당히 웃으며 불쾌한 질문을 삼켰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더는 삼킬 수 있는 목구멍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한창 많던 시기였는데 불쾌한 질문의 수위는 끝도 모르고 선을 넘어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마시지 못하면서 어떻게 네가 글을 쓰냐고 묻는 사람이 업계에 흘러넘쳤다. 한 프로젝트를 끝내고 뒤풀이 자리에 있으면 새로운 사람도 몇몇 합류하곤 했는데 누군가는 나를 소개하며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술 못 마시는 애야, 근데 좀 써.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시절이었다. 오기로 제 몸에 술을 부어가며 업에 대한 관습적인 행태를 유지하려던 동료도 더러 있었지만 넌더리가 난 나는 그 이후로 그나마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한 잔씩 채우던 일마저 처음부터 잘라냈다. 매번 불쾌한 질문을 삼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 직업에 대한 누적된 빈정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바라고 상상하던 대로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위스키 잔을 든 손을 바들바들 떨며 써줬어야 하는데 어쩌나! 나는 말짱한 정신 아래 또박또박 쓸 것인데. 낮이든 밤이든 맑고 또렷한 정신 아래 문장을 완성할 것인데.


시대가 변했다. 질문 하나에도 매너의 모양새가 갖춰져 요즘은 질문 자체의 가부를 먼저 따져보는 사람도 늘어났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분위기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까지 조금 편하게 살게 만들어줬다. 물론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업에 대해 술 따위를 걸고넘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알아서 사라진 탓도 있지만. 그런데도 불쾌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지금껏 나에게는 술이었지만 이외에도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 부지런히 참견하면서 불쾌함의 수위를 높이는 질문들은 여전하다.


이제는 어떤 질문이든 예전처럼 적당히 웃으며 삼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은 사실 억지로 참는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참을수록 곱씹을수록 타인이 아무렇게나 던진 불쾌함에 멍이 드는 건 내 몸이니까. 삼키지 않고 뱉는다. 그리고 내 인생에 구성된 것들을 다시 확인해본다. 여전히 유효한 나의 소박한 유희들, 천천히 위로를 주는 장소와 음식 그리고 각자의 기호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에 반하는 것을 쉽게 권하지 않는 친절한 관계로 들어간다. 나와 합이 잘 맞는 기호들이 나의 일상에서 오래도록 찰랑일 수 있도록 오늘 당신이 던진 그 질문을 삼키는 것을 금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