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몇 개의 처음이 남아있을까요?
대학교에 들어가던 때 일본식 돈가스가 학교 근처 골목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손바닥 크기의 돈가스 위로 고동색 소스가 기교도 없이 흐르던 것과 사뭇 다른 그 메뉴는 차림새부터 달라 학식을 벗어나고 싶을 때 조금 특별한 외식이 되곤 했다. 익숙하지 않은 간판과 매장 분위기에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기도 하고 괜히 두리번거리기도 했는데 사실은 내 앞에 앉아있던 D 때문이었을지도. 그는 내가 도와준 일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다며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이 내 기억에 기록된 첫 일본식 돈가스였으리.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대라 가게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물, 밑반찬과 함께 작은 도자기 절구가 각자의 자리 앞에 놓였다. 절구 안에는 깨가 깔려 있었는데 나는 이런 광경은 처음 봤단 말이지. 이걸 지금 어떻게 하라는 거지? 지금의 말로 동공 지진이 일어나 침만 크게 삼키며 손조차 테이블 위로 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본인 자리로 내 절구를 재빠르게 옮겼다. 그리고 슥슥-그 작은 방망이를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쿵쿵 찍기도 하고 또 슬슬 돌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고소한 향기가 둘 사이를 순서도 없이 오갈 때 아마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던 것 같기도 하고. 아하 그렇게 하는거구나, 라고 충분히 알았지만 그의 손가락을 따라나선 나의 시선이 쉽게 거두어 지지 않을 때 이 장면을 꽤 오래 기억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오래된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며 산다. 신기하게도 내가 챙겨야 할 이들이 태어난 계절은 봄과 가을 사이에 분산되어 있어 입동이 오기 전에 모든 행사가 마무리된다. 겨울생은 없다. 이 무슨 연고인고. 여하튼 매번 각자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을 고심해서 고르는데 한 친구에게는 전부터 해주고 싶었던 펜던트가 달린 14K 목걸이를 선물했다. 꽃과 함께.
약속을 잡아 둔 날 미리 꽃집을 찾아가 그녀가 좋아하는 색감에 맞춰 주문을 했다. 생각보다 예쁘게 나온 꽃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것이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기분은 발끝까지 향긋했다. 꽃 선물을 준비할 때면 늘 이 기분에 살짝 취하곤 하는데 오직 꽃으로만 가능한 행복이 여기에 있어 자주 하게 되는 것 같다.
친구는 여자에게 꽃은 처음 받아 본다고 했다. 쇼핑백에 감춰둔 선물에 대한 호기심보다 노골적으로 흔들리는 꽃다발에 이미 우리는 행복하니 이 테이블에 더 초대될 기분 따위는 없었다. 꽃을 주고 싶다고 오후 1시경에 즉흥적으로 출발한 내 마음은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음에도 쉽게 식지 않고 그녀의 집까지 따라가 며칠 밤을 더 보냈다고 들었으니. 누군가에게 ‘처음’이 되는 건 단순히 추억만으로 처리되지 않는 여운이 내내 함께할 것이라고 나의 경험에 비추어 얘기해둘 수 있다.
나는 이제 '처음'을 붙일 만한 일이 드물게 된 인생의 시간대에 진입한 모양이다. 내 생활 반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웬만해서는 익숙한 일이고 낯설다 한들 이제는 눈치와 뻔뻔한 기세로 능숙한 척 밀고 들어가기도 하니까. 처음이라고 하여 딱히 새롭다 호들갑 떨지도 않고 모든 것을 거기서 거기라는 진부한 범주로 편입시켜 버리고 마니 내 앞에 이제 작은 절구는 없는 걸까. 그건 조금 슬픈 일인데 말이지.
돌아오는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 작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고요해볼까. 노트북도 없이 폰도 안 보고 책도 읽지 않고 그저 가만히 한 자리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다 마시는 일을..할 수 있을까. 이게 내게 작은 절구가 될 수 있을까. 아 근데 요즘엔 그런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한다던데. 세상이 어떻게 될라고 이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