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결국 다 좋았다.

by 버들아씨

모처럼 에 제주에 가보겠다 큰 마음먹었는데,

빛나는 햇살아래 유채꽃 살랑이는 제주의 봄을 기대하고 있~는~데,


하필, 비예보라니!


공교롭게도 내가 제주에 갈 때마다 포근했던 기온이 곤두박질치듯 급강하하고 심지어 눈비까지 내린다.

올해 1월, 2월 다녀온 제주여행도 모두 날이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렵게 결심한 이번 여행마저 비가 온다니!


내가 날씨요괴가 되어버린 건가?

망상같이 억지스러운 의심이지만, 그 정도로 나는 맥이 풀렸다. 설상가상 여행 전날부터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온다. 컨디션도 좋지 않다. 숙소에 틀어박히거나 드라이브만 해야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본전 생각이 난다. 아주 꽝이다.


그간 제주는 여름과 겨울, 방학 때만 다녀왔다. 무덥거나 추운 계절이니 조금씩 아쉬움이 따랐다. '날 좋은 계절의 제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환상 같은 기대를 늘 품고 있었다.


까짓 마음먹으면 봄가을 좋은 날씨에 2박 3일 주말여행을 못 갈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모름지기 집에서 티브이나 보고 동네나 산책하는 것이 다음 주 직장생활을 위한 충전이라 여기는 나의 본투비 집순이 성향이 발목을 잡았다. 또 금요일 저녁에나 도착하여 토요일 하루만 온전히 즐기고 일요일엔 부랴부랴 돌아와야 하는 짧은 일정 대비, 항공 숙박 차량렌트등에 들어가는 만만찮은 비용도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위의 망설임을 떨치고 봄날의 제주여행을 과감히 결정한 내가, 전국적 비예보와 갑작스러운 감기기운에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첫째 날(4.3. 금.), 예보대로 비가 내린다.

조퇴 후 공항으로 직행. 오후 5시 제주도착.

거리곳곳에 4.3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애도하듯 비가 내린다. 나도 잠시 고개를 숙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달렸다. 에메랄드빛이던 애월바다는 흐린 하늘처럼 회색빛이다. 오래되었다는 협재의 칼국수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일행은 해물칼국수, 감기 걸린 나는 보말죽.

비내리는 제주, 해물칼국수와 보말죽

깜깜해져 도착한 숙소에서는 추가요금을 내고 바다가 보이는 방을 잡았다. 비와 감기로 숙소에 머무를 양이면 창밖전망이라도 좋아야 한다. 비는 밤새 내렸다. 창문을 열면 비바람인지 파도소리인지만 요란할 뿐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둘째 날(4. 4. 토.)

- 요괴 아니고 요정?

눈을 떠 창문을 여니 바로 앞이 바다다. 거센 바람에 흰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온다.

금능 앞바다

제 아무리 바람 불고 파도쳐도 봄은 봄일 터. 지금 기온 16도다.

오전 내내 온다더니 비가 벌써 그쳤다. 나, 혹시 날씨요정? 날씨요괴 어쩌고 하던 마음이 간사하게 바뀐다.

지난 2월 함덕바다, 그 겨울폭풍 같은 날씨에 혼쭐이 난 나는 만약을 위해 도톰한 캐시미어 머플러와 패딩을 챙겨 왔다. 16도여도 바람 불어 쌀쌀하다. 패딩에 머플러를 두르고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선다. 딱 좋다. 오늘 아침 감기약을 안 먹었는데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내가 사는 북쪽의 거대도시는 벚꽃이 아직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데, 이곳 금능리는 온통 활짝 핀 꽃잔치다.

노랗고 하얀 수선화, 연분홍 진분홍 꽃들, 여기저기 피어있는 노란 유채꽃이 지나가는 나에게 인사하듯 산들거린다.

금능리의 아름다운 꽃들

- 곶자왈의 푸른 숨결

오전에 방문한 곶자왈 도립공원은 밤새 내린 비로 서늘하고 촉촉하다.

우리는 전망대 - 빌레길 - 한수기길 - 테우리길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두 시간여 걸었다. 기분 좋게 춥고 습하다. 숲을 빠져나오니 감기기운이 싹 가셔있다. 곶자왈의 푸른 생기가, 숲의 신비롭고 건강한 숨결이 미세먼지에 탈이 난 내 목감기를 치료해 줬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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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본 곶자왈과 탐방로

- 면사무소 근처에선 실패하지 않아요.

생고등어조림과 옥돔구이

점심식사는 한경면 신창리의 현지인 식당.

낯선 곳에서 음식점을 찾을 땐 면사무소 인근 식당으로 가면 대체로 성공한다고 일행이 말한다. 관공서 직원이나 현지인을 상대하니 값도 적당하고 맛도 좋다는 것이다. 그럴싸하다고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박한 백반에는 뼈까지 씹을 수 있게 바싹 튀겨진 옥돔과 두툼한 무와 하얀 속살의 생고등어 조림이 나왔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생고등어 조림이 비바람 뒤 서늘해진 속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더니 저녁때가 되어도 배고프지 않았다.


- 여행신(神)의 선물

식사 후 드라이브를 하다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고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들 딸, 정정했던 60대의 친정엄마, 젊었던 남편과 갔던 그곳. 내 그림 <그리운 머나먼 곳>의 백년초가 있던 곳을 정말 우연히도 찾아냈다.

바로 한림읍 '월령코지'이다. 어디였는지 잊어버려 아득하기만 했던 장소였다. 뜨거웠던 그해 여름의 추억이 그리움으로 소환되었다.

머나먼 고향을 바라보는 듯한 백년초, 그리고 펜션

https://brunch.co.kr/@constance/64

그때 묵었던 '코지펜션'의 '코지'는 영어 cozy가 아니라 비쭉 튀어나온 지형을 말하는 '곶'의 제주도 방언이었다. 이 뜻밖의 발견은 여행신(神)이 우연처럼 내려주신 선물 같다.


- 올레 14코스, 아름다운 바닷길

추억의 장소를 뒤로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금능리에서 금능해수욕장, 협재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을 걸었다. 파란색을 찾아가는 바다가 몹시도 아름답다. 바람이 차지만 머플러와 패딩 덕에 추운 줄 모르고 저물어가는 바다를 즐긴다. 혼자서, 둘이서, 삼삼오오,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 많다.

휴대폰 걷기앱을 확인하니 2만 보가 넘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에도 그리 피곤하지 않다.

비예보에 실망하고 감기에 걱정하던 마음이 무색해진다. 오늘 하루 신나게 즐겼다.

# 셋째 날(4.5. 일.) 떠나는 날의 인사

날이 완전히 갰다. 하늘도 파랗고 바람도 부드럽다.

우리는 오전 11시 35분 비행기를 타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넉넉지 않다. 이른 아침 산책으로 마지막 날의 제주를 즐긴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길가의 꽃들과 나무와 까만 돌담을 눈에 담는다. 고운 햇살도 피부에 새긴다. 제 빛을 찾은 바다를 향해 크게 숨을 쉬었다. 파란색 박하사탕을 문듯 코와 입이 시원하다.

도착할 때 그러했듯 떠날 때도 한림과 애월의 해안도로를 따라 공항으로 차를 달렸다.

차창을 내리고 바다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또 보자.

# 좋은 날도 좋지 않은 날도 모두 나의 삶

떠나는 날의 제주날씨는 유독 좋다.

비 오다 맑아져서 더 좋은 것으로 생각되는지도,

떠나는 날의 아쉬움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고 꼭 바라게 된다. 다음에 또 오리라 마음을 먹게 된다. 이번에도 그렇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다 좋았다는

유명한 그 말을, 나는,

좋은 날도, 좋지 않은 날도, 그저 그런 날도 다 내가 받아들이고 걸어가야 할 나의 소중한 생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생각해 본다.


여행 전,

비가 온다고, 날이 좋지 않다고 실망했던 내 마음 참 가벼웠으나,

비 그치니 날씨요괴에서 날씨요정으로 변신했다며 그새 팔랑거리던 여행 중 그 마음도 참 간사했으나,


여행 후 이렇게 새삼 알았으니 그만 되었다.

결국,

2박 3일 주말여행의 모든 시간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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