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처럼 두근거리고 싶었어

사과퀼트

by 버들아씨

# 피아노에 사과가 열리면 좋겠어.


피아노 덮개를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살 때 딸려온 기계 퀼팅된 흰 레이스 덮개는,

딱 '서비스용' 뿐이라는 듯 철 지난 디자인과 조악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덮개를 볼 때마다 중학생 시절 보았던 대한뉴스가 떠올랐다.

전 학년이 날을 잡아 출동했던 영화관, 친구들과 앞뒤로 빽빽이 앉고 서서 보던 007 영화들.

기대 가득한 소녀들의 마음을 놀리듯,

영화는 로저무어의 잘생긴 얼굴대신 각하의 얼굴이 등장하는 대한뉴스를 먼저 틀어주었다.

그 뉴스에는 하얀 레이스 덮개가 얹힌 피아노와 그것을 연주하는 예쁜 아이,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이 나왔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국정홍보영상 속,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전형적인 클리셰.


나는 피아노 의자의 뚜껑을 열고 레이스 덮개를 똘똘 뭉쳐 그 속에 넣어두었다. 더 이상 치지 않는 악보들과 아이들이 배웠던 바이엘, 체르니 교본도 함께 넣었다. 노력만으로 안 되는 재능들과 그랬기에 지레 포기한 미련들도 묻어두었다.

이렇게 몰아넣고 의자뚜껑을 '쾅' 닫으니 마치 지나간 시절을 봉인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치지 않아 이제는 가구처럼 조용해진 피아노. 그 외로운 어깨 위에 걸쳐줄 새 덮개를 만들기로 했다.

피아노는 오크색 원목으로 된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갈색을 나무로 삼아, 사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듯한 모습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숲 속 통나무집의 투박한 목재 가구들, 그 위를 덮은 포근한 패브릭, 옆에 놓인 사과 바구니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피아노의 존재가 다시 살아나길 바랐다.




# 내 마음도 사과같이 두근거리고 싶었어

사과퀼트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년이나 고학년이었을 무렵 만든 것이다.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만큼은 손이 가지 않았어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출근하랴, 아이들 챙기랴, 살림하랴 마냥 분주하였다. 그러나 본래 게으르고 살림에 큰 관심도 없는 탓에 야무진 슈퍼맘들처럼 집안관리도 말끔히 하지 못했고, 아이들을 똑 부러지게 챙기지도 못하였다.

그저 매일매일의 분주함으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반복되고 단조로운 그 일상은 몹시 무료하고 재미없었다.


심장을 사과처럼 붉게 만들 뭔가가 필요할 때였다. 두근거리며 조금씩 가꿔나가 마침내 잘 익어진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주어진 여건에서 완성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이 사과퀼트였다.


나는 오래전 배운 퀼트의 기억을 살려, 어울리는 색과 무늬를 골라 천을 자르고 바느질하여 사과모양을 만들었다. 사과의 초록 이파리는 아플리케*하였다. 피아노전면, 덮개가 내려오는 부분에 옆으로 나란히 사과를 잇고, 피아노 위 평평하게 덮혀지는 부분은 큰 사각형들을 단순하게 배치하였다. 이렇게 패치워크*한 겉면아래 퀼팅솜을 대고 뒷면에 천을 붙여 손바느질로 누비며 덮개를 만들어 나갔다. 퇴근 후, 아이들이 학원을 다녀오거나 과제를 하거나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는 틈틈이 나는 이 작업에 몰두했다. 어떤 무늬와 색을 사용할까? 자투리 천을 활용하면 더 좋겠지? 이리저리 궁리하는 시간이 메트로놈 같은 일상에 멜로디 같은 생기를 주었다.


완성된 사과퀼트는 맘에 들었다. 나는 숄을 둘러주듯 피아노 위에 그것을 얹어준 다음, 몇 개의 사과를 더 만들었다. 사과 세 개로 작은 덮개를 만들어 거실 벽 두꺼비집을 가렸다. 남은 한 개는 패치워크만 해서 액자에 넣었다.


퀼트의 시간은 설레었다.

사과퀼트를 하면서 나는, 내 마음도 사과처럼 붉게 익어 두근거리기를 바랐다.

거실 여기저기에 사과를 붙이면서, 지금의 반복되는 나날들이 달콤하고 예쁜 사과로 주렁주렁 열리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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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옆 삽입.jpg



# 사과처럼 향기로웠다 말해줄 거야


오랜만에, 피아노 위 사과퀼트를 걷어 펄럭펄럭 먼지를 털어냈다. 모처럼의 햇살 속에 먼지들이 부유했다. 두꺼비집을 가렸던 사과덮개도 조물조물 빨고, 사과액자도 마저 떼어 하얗게 닦았다.

라디오에서 윤도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참이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노랫말은 외롭고도 아름다웠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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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노래에 귀 기울이며 생각했다.


지금의 삶은,

나날이 선택을 하듯 고르고 고른 색과 무늬들이

한 땀 한 땀 잇던 천조각들이

바탕천 위에 조심스레 얹어 덧붙였던 아플리케들이

'하늘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라는 노랫말처럼

모두 함께 꿰매지고 누벼져 만들어진 것일 거야.


일과 육아와 살림으로 반복되던 시계추 같던 그 시간들도, 사과처럼 단단히 익어가는 시간과 다름없었을 거야.


나는 갑자기 말해주고 싶어졌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지* 모르겠지만,

한 시절의 조각들을 이어준 사과퀼트에게

"고마워, 오래오래 남아줘."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오래된 퀼트에게 또 속삭여주고 싶었다.


"너와 함께해서 그 시간들이 사과처럼 더욱 향기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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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우체국 앞에서> 노랫말

* 패치워크(Patchwork) : 여러 조각의 천을 이어 붙여 하나의 큰 디자인을 만드는 바느질 기법.

* 아플리케(Appliqué) : 천 위에 다른 천이나 레이스, 가죽 등을 오려 붙이고 그 둘레를 실로 꿰매는

바느질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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