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VINO and KINO

영화, 와인에 취하다.

#4 버닝, 2018

by john C

유통회사 알바인 종수(유아인)는 배달을 하던 중 어릴 때 동네 친구 혜미(전종서)를 우연히 만난다. 어느 날 혜미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종수에게 부탁하고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혜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행 중 만난 남자 벤(스티븐연)을 데리고 온 것이다. 종수는 탐탁지 않지만 셋이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고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이상한 취미에 대해 말한다. 종수는 벤에게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그 해 칸 영화제에서 벌칸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거머쥐며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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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수상하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비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무엇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고, 어떤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

작가가 꿈인 종수는 작가적인 면모가 보이지 않고, 말로만 존재하는 혜미의 고양이는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버지의 수감에 하는 수 없이 시골집을 지키게 된 종수는 포르셰를 타고 온 벤과 혜미와 함께 와인을 마신다. 이때 마시는 와인은 샤또 라그랑주라는 보르도 좌안 지역의 섬세하고 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생줄리앙 마을의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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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와인을 나누는 대표적인 등급체계인 그랑끄뤼끌라쎄는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분류하며, 100년 이상 한두 번의 순위가 변동되었을 정도로 그 입지나 위상이 단단하다.

생줄리앙의 와인은 1,2등급은 없지만 3등급의 와인이 어느 지역보다 많을 정도로 소위 가성비 보르도 와인이라 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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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좌안지역답게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그리고 쁘띠베르도가 블렌딩 되어 구조감이 탄탄하며, 신선한 꽃향기와 검붉은 과실의 향미가 뛰어나다. 실키한 촉감으로 혀에 닿는 느낌부터 목을 넘어가는 순간까지 자연스러움이 가득하다.


이 와인의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향과 탄탄한 구조감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과 닮았다.

향은 본디 휘발성으로 한 번에 온갖 신경세포를 자극하다가 수초이내 사그라진다.

구조감 역시 혀 위에서 맴돌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실낱같은 느낌조차 없어지고 만다.


존재와 비존재.

극 중 혜미의 대사에서 그 사이 무언가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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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중요한 건 진짜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버닝'은 태운다는 뜻이다.

헛간이 타서 티끌이 되고 그 티끌도 타서 존재하는 아닌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면, 헛간의 존재는 완전히 없어지는 걸까.


어느새 비워진 와인병만 덩그러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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