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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Mar 01. 2020

출산 휴가를 떠나는 남자 팀원에게 보내는 마음

순도 100의 웃음으로



회사 남자 팀원이 곧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배우자 출산 시 근로자는 10일의 유급 휴가를 보장받게 되었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부장님이 갑자기 팀원들에게


 "그나저나 O과장 2주 휴가 가도 괜찮지?"


하고 물으셨다. O과장이 아니라, 나머지 팀원들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리의 팀원들은 O과장님을 빼놓고 모두 여직원들이었다. 괜찮고 말고 할게 어딨어요, 당연히 가야죠! 하고 나니 O과장님과 같은 파트에서 일하는 팀 막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펴지는 걸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부장님은 기어코 "OO씨 지금 뭔가 표정이 안 좋은데?" 하며 농담을 했다.


나 역시도 순간 표정관리가 안되었던 게 아닌가 속으로 놀랐다. O과장님이 10일의 배우자 출산휴가를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심이다. 그런데 그 진심과는 별개로 사실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일이면 2주인데 그 간 미룰 수 없는 필수적인 업무들은 나머지 팀원들이 나누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O과장님이 하고 있던 팀 운영과 관련된 업무들은 비슷한 연차인 내가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부장님의 질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이유다. 휴가를 가게 될 과장님과 같이 일하는 후배 사원은 아마 2주 간 사수의 공백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그 후배 사원과 둘이 걸어가며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후배는 과장님이 당연히 출산 휴가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필이면 그 2주가 가장 바쁜 시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순간 표정관리가 안되었다고 했다. 분기 말에 전사 워크숍도 걸려 있고, 아직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도 않은데 혼자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한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후배를 보며 나 역시 이해한다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마주 보며 씁쓸하게 웃고 나니 얼마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O과장님과 나머지 여직원 3명이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과장님이 곧 출산을 하는 와이프 이야기를 하며 둘째가 태어나면 계속 맞벌이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와이프는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데 그냥 복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 말에 여직원 3명이 그런 게 어딨냐고 내 일처럼 격분했었다.


과장님이 누구보다 가정적인 남편이고 해외 출장이 많은 와이프 걱정에 한 말임을 알고 있긴 했지만, 우리는 순간 대동단결 엄마도 자기 일이 있어야 한다며, 과장님이 육아를 더 많이 분담하면 되지 않냐며 바른말 대잔치를 했었다.  


불과 며칠 전 그래 놓고 막상 "O과장 2주 휴가 가도 괜찮지?" 하는 부장님의 질문에 "당연하죠!"라고 대답하며 정말 1의 망설임도 없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게 되었다. 후배와 마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은 순간을 떠올리니 뭔가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맞는데, 억울하기도 했다. 부끄러운데 억울하고, 억울한데 어딘가 부끄러운,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한 채, 얼마 전 이다혜 님의 책 '출근길의 주문'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직급이 올랐다고 해도 많은 직장인들은 딱히 결정권이라는 걸 자유롭게 갖는다고 느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아랫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 비겁한 변명이다. 그래서 윗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여성들도 있다. 나쁜 결정들에 참여하는 것 말고 득이 없다고 느껴서. 하지만 그런 일에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면,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니다. 실무에 머문다고 해서 정년이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려워도 책임지는 자리에 가는 경험이 커리어의 성장을 불러온다. 책임지는 자리에 여성들이 많이 도달해야 다른 여성들을 능력에 맞는 자리에 배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이 광의의 협업이다.


                                       


내내 찝찝했던 나의 마음이 '질문'이었다면, 책의 문장  '광의의 협업'이라는 말은  질문의 대답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걱정이나 불편, 부담을 감수하고 O과장님의 10 남편 출산 휴가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일종의 '협업' 것이었다.


우리가 남자 팀원의 출산 휴가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그 팀원이 육아를 배우자와 당연히 공동 부담하고 참여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눈치 보지 않고 10일의 출산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를 통해 남자 팀원의 배우자는, 복직을 할 수 있을까?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멈출 수도 있다. 조금은 일을 더 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경력 단절 없이 복직을 하고, 능력에 맞는 자리에, 책임지는 자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정말로 광의의 협업이 가능하다. 조직에서 늘 그렇듯 협업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더 큰 일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10일 유급 휴가를 떠날 예정인 동료의 이야기를 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문득, 고작 10일의 휴가에도 이런데 출산 휴가나 육아휴직을 가는 여성 직장인들이 마주하는 씁쓸한 미소들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다들 축하한다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겠지만, 부서 업무 조정이나 대체 인력에 대한 고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동료의 씁쓸한 혹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얼핏 보게 된다면.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아직도 내 잘못이 아님에도 미안함이나 불편함 같은 마음을 가진 채로 출산 휴가나 육아 휴직에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출산휴가를 가는 팀원에게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하기 전 거울을 본다. 혹시라도 얼굴에 씁쓸함이 묻지 않았는지 확인을 한다. 씁쓸함 0, 순도 100의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어야지. 이것이 결국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씁쓸한 미소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광의의 협업'이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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