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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Mar 17. 2020

재택근무를 해봤어야 알지

코로나19 기록하기 - 저도 재택근무가 처음입니다



자발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전자는 코로나 19 확산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고, 후자는 갑작스러운 사내 확진자 발생으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택근무를 '시행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요즘 친구들과 가장 많이 주고받는 질문이 "너희 회사 재택근무해?"다. 코로나 시국에 회사가 근무 형태를 어떻게 유연화하고 관리하는가를 통해 이 회사 오래 다녀도 될지 일종의 비전을 평가하게 된다는 말도 나온다.


시행할 마음도, 시행의 준비도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택근무를 시작한 기업들의 여러 웃픈 에피소드가 지인들에게서,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넘쳐난다.


건물에 갑자기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자가격리되어 재택근무를 하는데 당장 노트북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놀고)있다는 이야기, 재택근무가 시작되자 팀장님이 사내 메신저와 카톡방을 동시에 운영하며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하는 식의 불안 증세를 보인다는 이야기, 어린이집이며 유치원이 모두 휴원을 하는 바람에 화상회의 모니터 속 과장님, 차장님들의 어깨에 아이들이 한 명씩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 아무리 화상이지만 서로 예의는 지키자며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자는 팀장님의 말에 트레이닝 위에 상의만 재킷을 입고 일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런가 하면 이런 웃픈 상황 속에서도 영민하게 팀을 관리하고 신뢰와 자율 속에서 성과를 내는 리더들을 통해 코로나 19 시국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리더십의 옥석을 가리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 회사는 아직 재택근무는 임산부나 특수한 상황에 있는 직원들에 한해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있음에도, 팀원 한 명 재택근무 보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만큼 많은 부서에서 멘붕을 경험했다. 특히 우리 팀은 국가의 현 상황으로 따지면 중앙방역대책본부(중대본)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라 팀원들은 물론이고 부장님의 스트레스와 예민도가 폭발 직전인 상황이다.


그러던 중 임산부인 팀원의 재택근무를 신청하는 옆팀 팀장님과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부장님이 폭발하고야 만다.

(폭발이라기 보단 거의 울었달까.)



"O부장님 재택근무 직원 업무 일지 양식 있어?"

(일단 업무 일지라니 이 무슨 80년대 회사 분위기?)

"그런 양식이 어딨어! 나도 재택근무를 해봤어야 알지.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알았어. 그냥 만들면 돼? 왜 짜증이야.. (머쓱)"



'재택근무를 해봤어야 알지' 이 한 마디에 부장님의 환장할 것 같은 심정이 진심으로 이해가 갔다. 2020년쯤엔 출퇴근길 지옥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유연근무, 재택근무 같은 디지털 노마드적인 삶이 일반화되었을 줄 알았지. 이렇게 준비가 1도 안된 상황에서 전염병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는 2020년이 오리란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프로세스를 만들고 의사결정과 신청 절차, 각종 양식을 꾸역꾸역 만들면서도 분명한 한 가지는 바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기야 어찌 되었건 재택근무는 근로 문화의 하나로 이미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최근 2년여의 시간 동안 ‘주 52시간 근로제’의 도입과 정착 과정을 경험하며 기업문화 담당자로서 절절히 느낀 것은 기업문화에 점진적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와, 어느 정도의 충격과 강제의 힘이 문화를 넘어 의식을 바꾸는 것 자체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알아서 바꾸라고 해도 안되던 걸 강제로 하니까 되더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후 6시 10분 전부터 꺼질 준비를 하는 PC-Off제에 아예 퇴근하라고 불까지 꺼버리는 회사가 늘어나니 '야근하는 사람 = 일잘러'라는 공식이 급격히 깨졌다. 부서원들의 초과 근로 시간이 문제가 되고 평가에까지 반영되다 보니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이제 빨리 퇴근하라고 재촉하는 부서장님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일종의 충격 요법은 생각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빠르게 문화를 바꾸고 있다.


'코로나 19'로 촉발된 재택근무와 같은 유연한 고용 형태는 분명 주 52시간 근로제처럼 근로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방법에 대한 고민은 물론 '안 될 줄 알았는데 되네?'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얼마 전 친구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며 회사에서 재택근무 시켜놨더니, 재택근무 시작하기 하루 전날 팀원들과 퇴근하다가 갑자기 다들 내일부터 못 본다니 서운하다며 다 같이 (이 와중에)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한참을 웃었다. 웃다 보니 인간적인 유대를 중시하는 한국의 근로 문화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답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의 문학 세계를 표현하는 말 '홀로 그리고 함께(Solitaire et Solidaire)' 가 떠오른다. 코로나 19가 만들어 낸 계기와 변화를 통해 한국의 기업문화도 근로 형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홀로'와 '함께' 사이의 균형감을 찾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는 떠나고 새로운 문화는 남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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