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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Mar 09. 2020

직장인 정신승리법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기적



'발뮤다'를 만든 CEO 테라오 겐이 국내에서 책을 출간했을 무렵,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는 북토크에 다녀왔다. 이날 테라오 겐의 말이나 행동, 질문에 대답하는 태도나 몸짓 같은 사소한 디테일에서도 느껴지는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유로움' 이었다. 아무리 기업의 CEO라지만, 그의 태도는 오너를 넘어 어떤 경지에 이른 락스타에게서 느껴지는 자유로움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 20대 전부를 음악을 하며 보냈다고 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스트레스 하나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다 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인지라, 유독 그런 내용의 질문이 많았는데, 한 독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데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잘 모르겠다'며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방법을 물었다. 테라오 겐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땐 내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하고 싶은 것은 잘 모를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을 안 하면 된다. 하기 싫은 걸 안 하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의 아웃라인이 보인다.


그는 인간이 존엄함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만은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혹시 돈 때문에 그 기준을 팔아버렸다면 다시 사들이세요.
팔 수 있다면 살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에게 테라오 겐과 같은 인물은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다.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는 것은 곧 퇴사인 상황에서 그의 조언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고 보니, 회사가 잘 맞으시나 봐요? 한 회사 10년 다니면 지겹지 않으세요? 같은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때마다 "잘 맞아요. 재밌어요." 같은 대답은 절대 하지 못하고, 뭔가 부끄러운 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머쓱한 얼굴로 "그러게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사실은 테라오 겐처럼 "하기 싫은 일을 먼저 안 하면 됩니다" 하며 거침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자유롭고 당당한 표정을 갖고 싶다.


북토크가 끝나갈 무렵, 본인을 디자이너라 소개한 한 독자가, 발뮤다의 대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 디자인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테라오 겐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를 만든 게 아니라,
'가습 기능이 있는 항아리'를 만든 것입니다.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 이 말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테라오 겐은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는 만들고 싶지 않지만, '가습 기능이 있는 항아리'는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국 그가 만들어 낸 결과물은 동일하지만 관점의 전환으로 그는 순식간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독특한 디자인의 전자제품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작품으로서의 항아리를 만드는 마음으로 출시한 발뮤다의 가습기는 그 디자인만으로 시장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테라오 겐은 영민하게 생각을 바꾸는 것 만으로 소형 가전 회사의 CEO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능이 달린 아름다운 항아리를 만드는 회사의 CEO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 승리.(그러고 보니 그가 출간한 책의 제목이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였다!)




월급에 영혼을 팔고 하기 싫은 일을 매일 하는 직장인들에게 정신 승리의 방법은 '시발 비용'이나 '해외여행 결제하기'가 아니라, 그 일 자체를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테라오 겐은 '팔 수 있다면 다시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요즘 팔아버린 영혼을 다시 사는 마음으로, 회사에서 메일 한통을 쓰더라도 '독자(수많은 팀장님, 부장님, 옆팀 차장님, 파트너사 대표님, 이사님 등등)'의 마음에서 생각하고 쓰고자 노력한다. 그러면 그 노력은 뭔가 업무 일과가 아니라 글쓰기 연습 내지는 훈련 같은 생각이 들며 일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테라오 겐이 아니더라도, 발뮤다의 가습기 같은 매끈한 항아리를 만드는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하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놀라운 기적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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