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
지난 4월 15일에는 총선이 진행되었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16일은 세월호 6주기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느낌 탓인지, 코로나와 선거 이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조용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던 6주기였다.
6주기를 맞이하는 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는 마음으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만든 416합창단의 노래와 이야기를 담은 책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을 구매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노래라니 어쩐지 바로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며칠 동안 책을 두고만 있었다.
내가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호 6주기를 추모하는 여러 글들 가운데, 작가이자 뮤지션인 요조의 글을 읽었다.
내가 아주 잘 지키는 다짐 중에는 '어떤 책과 영화 앞에서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차마 못 읽겠다(보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가 있다. 그 앞에서 나의 가슴아픔을 우려하는 일이 한없이 비루하고 유치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월호 6주기를 앞두고 발견한 이 책. 세월호 엄마아빠들이 합창단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른다니. 읽기도 전인데 표지만 봐도 목이 멘다.
실제로 일어난 아주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룬 책이나 영화 앞에서 나는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난 그런 거 잘 못 봐", "난 안 볼래" 같은 말을 했던가.
4월 16일이 지나고 며칠 뒤, 부끄러운 마음으로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며칠의 주저함에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생각보다 담담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헤아릴 길 없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였지만 꾹꾹 참고 문장들을 읽어 나갔다. 416합창단의 지휘자 박미리님은 말했다.
엄마들이 노래를 한다.
내내 눈물이 전부인 노래를 끝내 뱉는다. 한계가 없는 사람들의 소리는 이런 것인가 싶다. 노래는 떠난 아이에게 묻는 여전히 낯선 안부인사이고, 힘이 되어 달라는 간곡한 기도이다. 또 어떤 날은 뒤늦게 아이의 마음을 듣게 되는 마법이기도 했다가 묵직한 혼잣말이기도 하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책 속에 소개된 416합창단이 지난 6년간 놀라울 만큼 많은 현장에서 희망을 노래해 왔기 때문이다. 억울한 해고, 억울한 죽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거듭되는 재난 재해 참사의 현장에서.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고, 아픔이 아픔을 감싸주는 그런 노래를.
이런 꿈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두고 소설가 김훈은 말했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의 야만적 속성들은 낱낱이 드러났는데, 그중에서 못 견딜 일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재수없는 소수자로 몰아붙여서 구박하고 소외시켜서 다수자의 안락을 도모하려는 사회적 태도였다. 416합창단은 그 야만적 현실 속에서도 슬픔과 그리움, 희망과 사랑을 노래했다. 그들은 세월호 관련 행사에서 뿐 아니라, 쉴 새 없이 거듭되는 재난 재해 참사의 현장에서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는 일상의 사소한 구체성에 바탕해 있었고,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의 슬픔을 감싸서 슬픔을 데리고 슬픔이 없는 나라로 가고 있다.
출근길 지하철에 앉아 읽으며 꾹꾹 참았던 눈물은 끝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터지고야 말았다. 책의 마지막은 원고지 칸 위에 꾹꾹 눌러 적은 세월호 유가족 엄마, 아빠의 손편지였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슬픔을 감싸서 슬픔을 데리고 슬픔이 없는 나라로 가는 존경스럽고 기적적인 이야기에도 잘 참았던 눈물이었는데. 그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손으로 적은 말 사랑해, 보고 싶어, 제발 오늘 밤 꿈에 나와 줘, 하는 사무치는 그리움 앞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나 지금 지하철인데, 하는 자각 앞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제대로 눈물을 닦지도 못하는 사이, 투둑 하고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모르는 사람의 옷자락 위로 내가 흘린 눈물이 떨어졌다. 아마도 파일럿이거나 승무원인 것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당황하여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지고 있는 얼굴로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모르는 사람의 옷자락 위로 눈물을 떨어트리다니. 3초가 3분처럼, 아니 3시간처럼 느껴졌다. 분명 그 사람도 내가 떨어트린 눈물방울을 느낀 듯했지만 미동도 없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눈물이 떨어진 옷자락을 털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문득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2~30분 전부터 나란히 지하철에 앉아 왔던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대략은 알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읽고 있는, 페이지마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합창단의 사진이 있는 책을 눈길로 살짝 쳐다보기도 했으니까. 그 무렵 세월호 6주기를 지나고 있어 포털 사이트 기사나 SNS 피드에서도 세월호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이맘때쯤 우리는 늘 비슷한 슬픔의 정서와 추모의 마음을 공유해온 지 6년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신의 옷자락에 떨어트린 눈물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주는 모르는 사람의 그 다정한 무관심에서 따뜻한 말을 건네받은 것 같았다. 울어도 된다고, 그럴 수 있다고, 더 울어도 괜찮다고.
당신도 한 번 겪어봐, 가 아니라 이런 고통이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된다고, 당신은 이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다고 용감하게 외치고 노래하는 416합창단의 숭고한 마음들에게 힘이 되는 것은 함께 울어주는 것일까. 그것으로 미약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가늠할 길은 없지만 조용히 노래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만 울라는 야만적인 말을 멈추고 다정한 무관심으로 눈물을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울어도 된다고, 더 울어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