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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Sep 29. 2020

재택근무 첫날 몸과 마음에 일어난 반응

코로나19 기록하기 - 재택근무 적응기 1



요즘 회사에서 파트별로 돌아가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재택근무라니 듣기만 해도 디지털 노마드 느낌적인 삶은 내 인생엔 없을 줄 알았는데. 코로나 19 상황의 장기화에 회사는 급하게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끝내는 우리 사옥은 아니지만 계열사 건물 내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사옥이 폐쇄되는 상황에 이르자, 전사 차원에서 시급히 만든 재택근무 프로세스를 반강제로 도입하게 되었다.


나인 투 식스, 월화수목금 밖에 모르던 10년 차 직장인이 난생처음 재택근무를 하자 몸과 마음에 다양한 반응이 일었다.


첫 번째 반응, 재택근무 하기 전날이 마치 휴가 전 날처럼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아침 9시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하는 것은 사무실에서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눈을 뜨고 집 밖을 나갈 행색(?)을 갖추고 지하철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된다. 이 시간을 가볍게 생략하고 침대에서 바로 노트북 앞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주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저 회사에 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있었던 건지도.


두 번째 반응, 5분 내 출근 완료 상황의 환희도 잠시, 재택근무 시스템에 접속하는 과정에서 깊은 빡침을 느꼈다. 시스템이 긴급하게 도입되다 보니 과도기적인 상황이라 인프라가 원활할 리 없었다. 더구나 예상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동시에 재택근무를 하게 되며 담당 부서는 거의 업무 마비 상태.


우선 집에서 완벽한 업무 환경을 세팅하는데 무려 45분이 걸렸다. 그나마도 사내 메신저를 접속하면 업무망이 꺼지고, 메신저 창에 상대방은 쓰고 있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등 다양한 기현상이 일어났다. 편집 툴 같은 조금 무거운 프로그램을 작동하려고 보면 다운되기를 반복, 결국 편집 툴을 써야 하는 일은 내일 할 일로 미루었다.


세 번째 반응, 재택근무를 한 첫날 직감했다. 재택근무하는 일자가 늘어나면 분명 살이 찔 것이다. 평소 회사에서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 운동량이 거의 '무'에 가까움을 느꼈다. 출퇴근길, 사무실에서 회의실 가는 길, 점심시간의 짧은 산책 만으로도 나는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니 행동반경이 내 책상 주변 2~3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고작 움직이는 건 집 안의 화장실을 몇 걸음 걸어가는 정도? 집에서 일하는 내 주변의 프리랜서 분들이 요가나 필라테스나 발레 같은 운동을 왜 강박적으로 꾸준히 하는지 알 것 같다.


네 번째 반응, 다 같이 재택근무가 처음인 탓에 우리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나도, 동료들도, 부장님도 일단 무조건 하라니까 하는 재택근무가 당황스럽다. 일단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 업무 환경에 접속을 하면 어찌어찌 업무를 시작하는데, 일단 대면 업무가 불가능하니 주로 사내 메신저와 전화 통화를 이용한다. 재택근무가 상시화 된다면 분명 화상회의가 보편화될 테지만 아직은 주 1회 정도 돌아가며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이라 메신저와 전화로 커버가 가능하다.


대신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생겼다. 사무실에서는 메신저 대답이 없으면 회의 하나보다 하는데, 재택근무를 하니 따박 따박 메신저에 응답하지 않으면 혹여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 얘가 노나?) 하는 생각을 할까 봐 오히려 메신저 창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넵, 넵, 저 여기 있어요, 하며 즉각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회의 중이면 스마트폰에 자동 설정된 '회의 중입니다. 잠시 후 전화드리겠습니다' 메시지를 남기는 게 당연했는데, 재택근무를 하니 '부재중 전화 = 아니 얘가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물론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있지만 이 불편한 신경 쓰임은 재택근무 초반에 다들 느끼는 듯했다.




내 머릿속 디지털 노마드의 이미지. 재택근무 환경도 겉모습은 거의 비슷했다.


재택근무를 시행했다, 기보다 시행당했다, 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준비가 덜 된 과도기적 상황 탓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재택근무를 할 문화적 기반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웬만하면 다 같이 모여 회의하는 대면 업무가 익숙하고, 눈 앞에 있어야 일하는 것 같은 분위기.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과 워라밸의 확산으로 많은 부분 개선은 되었지만 이 또한 노동법이라는 강제적 상황에서 준비하고 시행되었기에 문화적 성숙의 시간은 부족했다.


야근을 당연시하고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공식은 깨졌지만, 인식 자체가 완전히 변하려면 일하는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성과로 평가하는 정교한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재택근무가 정착되려면 더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그 평가 시스템이 누가 봐도 합리적이어야, 몇 시에 와서 몇 시에 가는지 어디에서 일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자율적인 근로 문화가 정착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과도기적 상황에서 과도기적으로 시행된 재택근무 첫날, 5분 이내로 출퇴근이 가능한 삶 - 눈 뜨면 출근, 노트북을 끄면 바로 퇴근 - 으로 몸은 너무 행복했지만 정신은 불필요한 스트레스로 오히려 피곤함을 느꼈다. 이 또한 적응의 영역으로 해결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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