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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Jun 21. 2020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선배

모두의, 그리고 각자의 삶을 위하여



장수연 작가의 책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에는 라디오 PD인 작가가 만난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 공동대표가 했던 말이 나온다.


“모든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이 줄어야 해요. 출산한 여자만, 육아 중인 남녀 근로자만 일찍 퇴근하는 건 직장 내 갈등을 유발하고 반감만 더할 뿐이에요. 모두가 일찍 퇴근해서 애를 돌보든 반려견∙반려묘를 돌보든, 기타나 드럼을 배우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이 문장을 읽는 동안 최근 내 주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떠올랐다.




'출산한 여자'라는 단어에서는 얼마 전 '육아기 단축근무'를 신청한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는 회사에서 ‘1호 신청자’인 덕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제도임에도 이른바 '용자'가 되었다고 한다. 노조에서 용기를 내주어 고맙다고 전화까지 받았다고. 이러다 최초로 육아기 단축근무 신청하고 노조위원장 후보로 나가는 거 아니냐는 웃픈 농담을 하긴 했지만 친구는 팀 내에서 꽤 불편한 상황인 모양이다. 불가피하게 내 일이 팀원들에게 조금씩 배분되면서 너무 눈치가 보인다고 한다.


‘반려견’이라는 단어에서는 얼마 전 사내 동호회 회식 때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회식 참석 명단을 정리하던 중 한 남자 대리님이 갑자기 참석이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이유는 ‘애기 유치원 하원’ 때문이라고 했다. 순간 당황했다. 결혼도 안 한 대리님이 애기 유치원 하원이라니? 알고 보니 대리님의 ‘울 애기’는 반려견이었다. 혼자 살며 반려견을 키우다 보니 일주일에 삼일은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고. 결국 회식 장소에 반려견 동반이 가능함을 확인하고 동호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대리님은 반려견을 데리고 회식에 왔다. 유치원에서 교육을 잘 받은 덕인지 아빠를 따라온 반려견은 있는지도 잘 모를 만큼의 얌전함과 예의 바름으로 모두의 귀여움과 칭찬을 독차지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이라는 단어에서는 친한 회사 동료가 떠올랐다. ‘화려한 직장인 싱글남’의 로망을 적극 실천하며 살고 있는 취미 부자 동료인데, 얼마 전 나에게 회사 제도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직원들의 주거 안정을 위한 사내 전세자금 대출 지원 제도 중 하나가 ‘기혼자’들만 자격이 주어진다는 거였다. 몰랐던 일이라 찾아보니 정말 그랬다. 싱글이라고 전셋집을 구하는 게 쉬울 리 없고, 연령대가 젊은 회사 특성상 사내에 혼자 사는 직원들이 많았다. 아마도 오래된 제도의 지원 자격이 바뀌지 않은 채로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 탓일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도에 불평을 토로할 순 있지만 불평으로 끝나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직장 생활 10년 세월 동안의 깨달음이다. 나는 동료에게 노사위원회의 안건으로 한번 내보는 게 어떻냐고 말했다. 실행력 강한 동료는 바로 안건 메일을 보냈다.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개선이 필요해 보였기에 안건은 즉시 통과되었고 바로 다음 달에 전세자금 대출 지원 제도에서 ‘기혼자’ 조건은 삭제되었다.





육아를 하지 않아도, 반려견을 키워도 ‘나의 시간’은 소중하고 필요하다. 워라밸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특정 생애 주기를 지나고 있는 ‘일부 직원’이 아닌, ‘모든 직원’에게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 결혼을 하지 않았어도, 아이가 없어도 내가 살 집은 필요하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구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육아를 하는 직원도 있지만, 혼자 살며 요리를 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며 나의 취향과 취미, 개인적인  삶으로 집을 채워 나가는 직원도 있다.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각자의 삶이자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나 공동대표가 했던 ‘모든 근로자’라는 말은 중요하다. 모든 근로자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출산한 여성이나 양육을 해야 하는 직원과 같은 특정 근로자가 눈치 보지 않기 위해서, 갈등을 유발하거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장수연 작가는 글의 말미에 이런 담론에 대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현실을 잘 알고 있을 만큼 오래 일한 분들이며, 바로 ‘그 사람’들에게 지금의 체제를 바꿔 갈 책임과 역량이 있다고 말했다.




입사 10주년을 지나고 보니 ‘그 사람’들에 나도 포함됨을 느끼고 있다. 1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 문제를 몰랐다면, 모르는 것 또한 무책임한 일이다. 조직 내에서 ‘무지’는 곧 ‘무능’임을 지난 10년간 느꼈다. 10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지 않은 '몰랐던 문제'를 알았을 때, 같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거창하지는 않아도 회사가 조금씩 나아지는 일을 방관하지 않고 도모하는 선배가 되고 싶다. ‘난 몰랐어’, ‘현실적으로 어려워’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선배, ‘모르는 것’과 ‘하지 않음’의 부끄러움을 아는 기성세대로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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