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직장인들이 주식을 한다 (Feat. 슈퍼 개미)
임원 인사발령 시즌이 돌아왔다. 매년 있는 일이고, 큰 인사이동을 네다섯 번 정도 겪어서인지 이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신으로 버티고 있다. 문제는 우리 부장님이다. 줄곧 사업 부서에서 일하다, 인사발령으로 인한 부침을 직격타로 겪는 우리 본부에 처음 온 부장님. 요즘 부장님은 그야말로 인사발령 시즌 과몰입 상태다.
CEO의 변경이 분명 회사에 큰 일이고, 그로 인해 줄줄이 예상되는 임원 변경이 어떤 다채로운 임팩트를 가져올지 안 봐도 훤하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다. 마치 주식처럼 벌어진 일에 대한 '대응의 영역'만 있을 뿐.
예상치 못한 CEO 변경으로 나는 갑작스럽게도 한가한 3월을 맞이했다. 막 시작하려고 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당연하게도 신임 CEO 취임 이후로 미루어지며 생긴 2~3주 정도의 여유다. 물론 3월을 버리는 것 같아 (언젠간 해야 할 일임으로) 조금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직장생활 10년 + 알파의 짬바로 체득한 기적의 노하우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미리 고민하지 말자' 정도랄까.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그런데 요즘 우리 부장님은 매일 아침 본인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직원 몇 명을 불러 놓고 회의 아닌 회의를 진행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나) 앞으로 CEO가 바뀌면 임원 인사가 진행될 것이고, 이 사람은 어디로 갈지, 저 사람은 어디로 갈지, 그럴 때 우리에게 미칠 임팩트는 무엇일지. 그 사람은 이런 성향이라던데 우리 조직과 잘 맞을지, 이 사람이랑 잘 지내야 할 텐데 걱정이네 등등.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찌 될지 모르니 아직 안 해도 될 걱정' 혹은 '미리 걱정해봤자 소용없는 걱정' 정도이겠다. 이 걱정을 한 시간 정도 듣고 나면 나는 적당히 지친 표정을 지으며, "부장님, 임원 걱정은 하는 게 아니래요. 그냥 우리 걱정이나 해요." 류의 농담 또는 "부장님 오전 중에 어제 요청 온 거 빨리 끝내야 할 거 같아요" 같은 일 핑계로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를 시전한다. 그런데 내가 가장 대단(을 넘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옆에 늘 함께 앉아 있고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는 우리 팀 차장님이다.
차장님은 뭐랄까, 사물에 비유한다면 새하얀 백자 같다. 담아도 담아도 끊임없이 비워내는 백자. 부장님과 주 4일 정도는 카풀로 같이 퇴근하기 때문에 분명 이런 대화 최소 하루 3시간일 텐데. 마치 오늘 처음 듣는 새로운 이야기인 것처럼 몰입하고 리액션한다. 와.. 차장이 되려면 저 정도는 돼야 하는구나. 과장 나부랭이의 인내심이란 한없이 가벼운 거구나, 를 끝없이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주식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소위 '슈퍼 개미' 유튜버가 주식 투자를 통해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이 '원치 않는 관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했다. 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어쩌면 원치 않는 관계의 연속이니까. 물론 좋은 사람, 배울 점이 있는 사람, 매우 아주 드물게 존경할 만한 사람도 만나지만 문제는 관계의 원함과 원하지 않음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직장 생활 대부분의 불행이 '원치 않는 관계'에서부터 오기에, 그 슈퍼 개미 유튜버의 말은 퇴사하고 전업투자자를 꿈꿀 만큼 강렬했다. 어쩌면 부장님에게 필요한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선택권 1도 없음) 기업 CEO의 변경이나 임원 인사발령 같은, 원치 않는 관계 변화로부터의 해방 인지도 모른다. 물론 해방은 퇴사뿐이기에 늘 외벌이의 고달픔을 토로하는 부장님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려놓음 즉 나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인 듯하다.
아직 CEO 정식 인사 발령까지 2주나 남았는데. 이 애매하고 모호한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고, 부장님의 인사 발령 과몰입 상태도 끝나고, 하루빨리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내는 일상의 직장인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