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니?
판도라의 상자를 받아 들었을 때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면 열어볼 거냐'니 너무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심리 테스트 같은 걸 하는 줄 알았다. "글쎄 나는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타입이라 안 열어볼 것 같기도 해." 내 대답에 안심한 듯 J는 자기를 믿고, 아무것도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달라고 말했다. 번호를 하나 줄 테니 그 사람이 나에게 연락할 수 없도록 카톡과 전화를 차단하라는 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누군가 나에게 연락할 수 없도록 번호를 차단하기. 간단하지만 너무나 이상한 부탁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이렇게 숨겨야 하는 사람이 누굴까... 거기다 내 쪽에서 번호를 차단하려면 상대방의 번호를 저장해야 하는데, 그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마시멜로우 실험 같은 걸까? 의미심장한 마시멜로우를 앞에 두고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인내심 테스트라도 하는 걸까? 머릿속에 질문들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J는 다른 지방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연락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메시지 답장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았다. 내가 오후쯤 점심 먹었냐고 메시지를 보내면 다음날 새벽 5시쯤 먹었다는 답장이 왔다. 그러고는 또 연락두절이 되고 어쩌다 전화를 받으면 배경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리거나 지쳐서 몽롱한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그 맘 때쯤 J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는데 어두운 실내에서 찍은 사진 뒤에 보이는 의자가 왠지 술집 같다는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평범한 식당의 인테리어는 아니었다. 처음 머릿속에 거품처럼 솟아오른 질문들은 모두 의심이 되어 갔다. 이상하다. 모든 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J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시간이 오후 4시 정도였는데 자다 깬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난 싸늘한 목소리로 이 상황을 설명을 해 보라고 말했다. 그 판도라 상자는 뭐며, 왜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으며, 돈을 번다고 하는 그 일은 무슨 일이냐고. J는 처음에는 좋은 말로 나를 달래려고 했지만 난 이런 일에는 꽤 집요한 편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는 답이 있고 세상의 모든 자물쇠에는 맞는 열쇠가 있는 법이다.
일단 J의 해명을 이러했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누군가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가 다시 돌려놨는데 그 사이에 내 개인정보를 빼가서 나를 협박했다. 내 가족들이나 여자 친구 번호를 알고 있어서 내 핸드폰 속에 있는 걸 알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 사람이 혹시나 너한테 전화를 할까봐 번호를 알려주고 차단하게 한 거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내 의혹은 더 증폭되었다.
핸드폰을 훔쳐갔으면 훔쳐갔지 가져갔다가 돌려놓았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가족을 운운하면서 협박할 만한 내용이 핸드폰에 있었다는 게 더 말도 안 된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약점 잡힐 일이 뭐가 있느냐. 거기다 네 핸드폰엔 내 사진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내 번호도 안다면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건데 왜 나만 모르면 된다고 번호를 차단하게 하느냐? 그 핸드폰 속에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이 있는 거 아니냐?
숨쉴틈도 없이 쏘아붙이니 J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두 번 세 번 걸어도 받지 않고, '전화 안 받으면 헤어지는 걸로 알겠다'는 메시지에 내 전화를 차단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때 내 안에 숨어있던 광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엔 질문들이 퐁퐁 거품처럼 올라왔는데, 의심이 파도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심해 깊은 곳에서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이성을 완전히 휩쓸어 가버린 것이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해소되지 않은 질문들과 그의 회피하는 태도가 날 완전히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계속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날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원망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말들은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의문을 풀어주고 이 광기를 잠재워 주길 바랐다. 보낸 메시지는 100개가 넘었고, 전화는 30통이 넘어갔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새벽을 꼴딱 지새우고 다음날 J가 메시지를 보냈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 사이 혼자 미쳐 날뛰고 있던 나를 아주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한 마디였다. 내가 배신감과 분노, 두려움에 발버둥 치는 동안 그는 평소처럼 일을 하고 나중에 자기가 편할 때 연락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래도 그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았는지, 그 매정한 답장에도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바보같이 내가 먼저 사과했다.
너무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연락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그때 했던 행동들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문이 생겨도 얼굴 보고 피하지 못할 때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다. 화가 나더라도 그렇게 저주 같은 말들을 퍼붓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악독한 말을 퍼부어서 결국엔 나도 절반의 잘못을 지게 된 셈이었다. 섣불리 사과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관계에서 을이 되었고 J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았다는 걸 이용해서 이후에도 날 좌지우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홀로 서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정서적으로 기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썩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려다 또다시 절벽으로 추락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