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 주는 상처
그렇게 내가 한 수 접고 난 후부터는 J에게 모든 주도권이 넘어간 관계가 되어 버렸다. 시소에 앉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너무 무거우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이 너무 커져서 내쪽으로 기울어버린 관계의 무게가 모든 걸 고착시켜 놓았다. 나는 내 마음을 다 보여줬기에 판을 뒤집을 다른 카드가 없었고 여전히 J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미스터리한 패들이 많았다. 이 연애게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은 모든 걸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전화를 붙잡고 싸운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배신감이나 나에게 어떤 걸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꾹꾹 누를 만큼 내가 그를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감정은 늘 그렇게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아끼던 원피스를 입고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그가 지내는 도시로 갔다. 그리고 한 달만에 그를 만났다.
사실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웃는 얼굴을 봤을 때 바로 알았다. 우리 사이에 그 전만큼 뜨거운 애정이나 친밀함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오랜만에 만난 낯선 나의 남자 친구. 아는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 거리감.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돌아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깨어졌다는 걸 직감하고서도 애써 이어 붙여보려던 노력들은 허무하고 눈물겨웠기 때문이다.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있는 동안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전처럼 추궁하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가려고 예매한 기차 시간이 임박했을 때쯤 J가 말을 꺼냈다. 카드빚이 천만 원 정도 있는데 예전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고. 그런데 그건 내가 궁금해 한 핵심이 아니었고 우리 사이를 박살 낸 판도라의 상자도 아니었다. 그 카드빚은 뭘 하다 생겼는지, 또 그게 왜 누군가의 연락을 차단하는 일로 이어진 건지는 단서가 전혀 없었다. 다시 질문을 했지만 그때 나는 이미 그에게 다루기 쉬운 인형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말하지 않으면 그저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넘어가 주면 좋겠어.
오랜만에 만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참아주고 얼굴이라도 보고 말하고 싶다고 2시간을 기차 타고 온 나에게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너무 속이 보이는 타입이었고 J는 심리게임에 능한 타입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가 요즘 말하는 나르시시스트여서 철저히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데 내가 끌려 다닌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에 난 모든 전투력을 상실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한판승. KO패.
집에 가는 길에도 집에 가서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가서 그가 연애 초에 건네준 편지 2통을 꺼내 읽었다. 나와 만난 것이 너무 특별하고 행복하다는 그의 고백이 조금 어설픈 글씨체로 쓰여 있던 편지. 이 편지를 전해주던 J의 얼굴에는 설렘과 쑥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이제 없구나. 우리는 다시는 이 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모든 게 완벽하고 드디어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바닥부터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가 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8개월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한 마디였다. 그럼 우리가 했던 건 뭐야? 그게 사랑이 아니면 나는 무슨 신기루 속에서 행복해했던 걸까?
솔직하게 말했어야 한다. 나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내가 배운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하지 못하게 비밀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만난 연인에게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로 뒤통수치는 무례함도 아니라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내 안에서 사랑이 끝나버리기를.
일전의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한번 불붙은 마음은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 스스로 사그라질 때까지, 내 안의 사랑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기다려야 했다. 덜 끝난 사랑은 미련으로 남아 오래 나를 괴롭게 할 테니, 바닥까지 다 사랑하고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때 모든 걸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