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시작은 꽤 낭만적이었어.
그의 사랑은 참 헛되었다.
내 성격을 동물로 비유하자면 소가 아닐까 싶다. 나이에 비해 우직한 성격이나 바보같이 성실한 태도, 지난 일을 곱씹는 버릇까지. 가끔 화가 났을 때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건 다 들이받는 걸 보면, 온순한 황소보단 뿔난 스페인의 투우소에 가깝다.
난 공부도 일도 성실하게 했지만, 연애도 성실한 학생처럼 했다. 연애 관계를 마치 공부처럼 여겨서, 열심히 노력해서 사랑했고 꾸역꾸역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도 억지로 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랑을 성적표로 받는다면 난 틀림없이 낙제생일 것이다. F학점도 아니고, D학점이라 계속 재수강을 해야 하는 사람. 세 번째 연애도 낙제했으니 난 학사경고를 받고 퇴학 위기에 처해있다.
그 세 번째 남자 친구이자 마지막 남자 친구와의 연애는 기진맥진한 연애였다. 끝을 보기 위해 달려 나가는데도 도무지 어디가 끝인지 모르는 질질 끄는 관계였다.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의 연애사에 내 감정을 너무 쏟아부은 탓인지, 그와 헤어진 지 2년이 되도록 긴 쿨타임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쉬어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마지막 남자 친구를 J라고 부르자.
J는 직전에 물소남과 시기상으로 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물소남과 헤어진 직후 만난 게 J였기 때문이다. J는 첫 만남에 내 향수 냄새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샤넬의 마드모아젤. 그는 금사빠였던 모양이다. 다만 난 J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약대에 다니는 학생이었지만 거의 체대생 급으로 몸이 크고, 굉장히 상남자스러운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난 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외모의 남자가 취향이다.
첫 만남 이후 내가 약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J가 적극적으로 나와 만나려 할 때, 신묘한 타이밍으로 물소남이 연락을 했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애매한 시간을 열흘 정도 보냈을 때, J와 두 번째로 만났다. 그런데 J는 내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내 핸드폰을 보고는 물소남과 연락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기를 두고 간을 봤다며 화를 낼 법도 한데, J는 대신 자기에게 오면 더 잘해주겠다고 전 남자 친구는 정리하고 오라는 말을 했다. 그 모습이 미묘하게 예전 내 모습과 겹쳐진 것 같았다. 전 남자 친구에게 주차장에서 나에게 오라고 설득하던 모습. 불과 3개월의 시간 동안 상처 받은 입장에서 상처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의 카르마는 이렇게 빠르고 정직하게 돌아온다.
특이한 점은 그날 대화를 하면서 J가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 말해 줬는데, 20대 내 또래 중에 누구도 그런 주제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종교나 뉴에이지 철학에 심취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겨내고 더 성장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그의 곧은 눈빛이 참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는 것 자체가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J와 연애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초반 러시형 남자다. 쉽게 불타오르고 금세 꺼지는 사랑. 연애 초반에 J는 내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편지를 써주고, 전화로 노래를 불러 줬다. 20대의 마지막 연애에 그런 낭만을 느낄 수 있게 해준건 그에게 고마워할 일이다. 사랑 앞에서 오래 망설이고 언제나 잘 못된 선택을 하는 나에게 J의 그런 쏟아붓는 사랑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낭만은 3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그와는 좋지 못한 시기에 만났던 것 같다. J는 형편이 어려운 집의 장남이었고, 편입시험을 보고 들어간 대학의 등록금을 대출받아 다니고 있었으며, 생활비도 직접 벌어서 써야 했다. 그래서 방학 중에는 지인의 일을 도와 지방에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 학기 중에 생활을 했다. 그렇다 보니 나와 만난 지 한 달째 경기도 안양에 일을 하러 간 것이다. 한창 친밀감을 쌓을 시간에 그렇게 떨어져 있는 데다, 연락도 잘 닿지 않으니 나도 그도 금세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참 우습게도 100일도 되기 전에 헤어지자고 말을 했다. 감정이 별로 무르익지 않았을 때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을 거라고 믿었다. 난 그때도 우울증 상담을 받고 있었고, 감정 기복이 심할 때였기 때문에 힘들고 감정 소모가 많은 J와의 관계가 부담스러웠다.
J는 그때도 나를 붙잡고 자기가 더 잘하겠으니,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했었다. 그는 금사빠였으나 고집도 있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서 6개월가량은 보통의 연인들처럼 평탄하게 연애를 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났고, 당시 기숙사에 살다가 J가 자취방을 구하면서 집에서 데이트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와 밥을 지어먹고, 함께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에 짓궂은 장난을 치던 시간들은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도 또렷하게 남은 기억 하나는, 그와 나란히 누워 그의 팔을 베고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보던 시간이다. J가 등 뒤에서 날 안아 주었고, 바스락 대는 이불에 푹 감겨서 창 밖에서 부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을 보고 있었다. 밖에서 부는 바람은 제법 선선했지만 이불과 그의 품이 따뜻해서, 난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은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그런 사소한 추억일수록 깊은 슬픔을 남기는 법이다.
시간이 흘러 여름방학이 왔고 J는 전처럼 다른 지방에 일을 하러 간다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나 함께 노래방도 가고 게임도 하면서 평범한 연인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헤어질 때 아쉬워 하면서 지금처럼 자주 볼 순 없겠지만 이번에는 잘 기다려 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 소박한 추억들이 쌓여 그와의 관계가 너무 행복하고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다고 느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J가 갑자기 문자로 나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면 열어 볼 거야?
물소남과의 연애이야기와 깨달은 점에 대한 글 <나는 이별로 사랑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