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수컷들의 슬픈 단상

욕구와 욕구를 거래하는 우리 사회

by 구름조각

다니던 여고 앞에 바바리맨이 나타난 적이 있다. 사실 바바리맨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 그는 바바리를 입지 않고 헐벗은 하체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나타났다. 비 오는 날 그를 마주친 같은 반 친구는 혐오감 이전에 그 비주얼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놀란 나머지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 사이에 애매하다는 중년의 한 남성이 망사 스타킹을 신고 가운데를 덜렁 대면서 쫓아오다니. 나는 그 꼴을 생각하니 퍽 우스워서 배를 잡고 낄낄댔었다. 어떤 친구는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었지만 나는 그저 그의 처지가 처량하여 약간의 동정과 해학을 느꼈다. 어쩌면 너무 충격적인 비주얼을 상상하여 방어기제로 웃음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


12살 때 그런 노출증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면서 길을 가고 있는데 내 옆으로 차가 붙어 가기에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가 거기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고 흠칫 놀라니 그대로 액셀을 밟아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꽤 창의적이라고 감탄했다. 차를 타고 앉아서 서있는 내 시야에 본인의 그곳을 노출시키고 따라가지 못하도록 차를 타고 도망쳤으며 충격에 번호판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다니. 여러모로 용의주도한 찌질이임이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12살짜리 여자애가 자신의 작고 소중한 그것을 봐주길 기대하며 차 안에서 바지를 내리고 내 옆으로 따라붙었을 그가 참 우스웠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진짜 웃음을 참지 못한 상황은 지하철에서 일어났다. 대학시절 오후 수업이 있어 등굣길에 지하철에 탔는데 드문드문 앉아 있는 한가로운 지하철 사이로 요망한 신음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 지하철 칸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듣는 순간 알았을 것이다. 이건 동물이 우는 소리도 아니고 아파서 내는 신음소리도 아니고 싸구려 포르노 영화에나 나올법한 여자의 과장된 신음소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누가 이런 소리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서 모두들 그 민망한 소리 사이로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자를 눌러쓰고 핸드폰 화면을 유심히 보는 아저씨에게 모였다. 소리 없는 질문들이 눈빛으로 오고 갔다. '저 사람인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어색한 상황에서 우리의 용감한 아주머니들이 허공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지만 모두 모르는 척하는 상황. 때마침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서 자리에 일어난 나에게 아주머니는 "아가씨 내리면 꼭 신고해요!"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음... 제가요?" 뜬금없이 책임을 떠안은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굳이 신고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심증으로 지켜본 그 아저씨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고 지하철은 다시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하게 공연음란죄라는 죄목이 붙는 행위이고 절대 살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인간이라기에 수치스럽고, 같은 인간이라 그들이 안쓰럽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질문에는 '그렇게 까지 자신의 존엄성 따위를 성욕 앞에 내팽겨 쳐야겠어?'라는 의문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고 집에 가서는 충실한 아버지, 성실한 남편, 평범한 시민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건가?


내 생각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느낀 것은 약국에서 일할 때였다. 약국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가 처방전도 없이 거래하는 도매상으로부터 비×그라를 10통 사가면서 자기 동생에게 준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법적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 40대의 남동생은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접대를 할 일이 많은데 비아×라를 몰래 찔러 넣어주면 거래처 사장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 이런저런 접대야 자세히 안 들어도 무슨 일일지 쉽게 상상이 돼서 더 물어볼 것이 없었고, 그렇게 서로의 아랫도리 사정까지 생각해 발기부전제를 챙겨주는 중년 남성들을 생각하니 그들만의 전우애나 동지애가 느껴지는 것 같다. 마음은 굴뚝같으나 몸이 안 따라주는 상황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몰래 약이라도 챙겨주면 서로 감격하는 관계라니. 피를 나눈 형제보다 낫지 않은가.


어딘지 강박적이고 욕구를 잔뜩 억눌러 놓은 삶의 민낯이 처량하게 느껴진다. 그곳이 힘을 잃을수록 남성성도 힘을 잃고 자존감도 잃고 그렇게 사회의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나. 그렇게 접대라고 부르는 일은 상대의 식욕과 성욕을 만족시켜주면서, 상대가 나의 욕구를 만족시키길 기대하는 활동 같다. 좋은 음식점에서 대접하고 은밀한 욕구 해소도 도와주면서 내가 원하는 거래를 성사시켜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회와 가족들에서 인정 욕구를 채우는 사이클. 그렇게 서로의 욕구와 욕구를 거래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 룰(rule)인 것이다. 심지어는 거래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회사가 우선하길 기대하면서 거래처의 비위를 맞추는 건... 환상에 베팅하는 도박 같기도 하다.


회사 생활 5년 차인 내 친구는 그런 접대의 분위기가 있을 때마다 눈치껏 일찍 집에 간다고 말한다. 여성 접대부가 나오는 노래방에 가서 그들이 정을 쌓을 동안 여직원인 친구가 가서 할 일은 없다. 그 친구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부끄러운 민낯의 목격자이자 쓸데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접대 없이도 사업을 따 올 능력이 안되면 조용히 물러나 주는 게 최소한의 협력인 셈이다. 그렇게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서 접대를 하고 나오면 노래방 여자, 아내, 딸, 회사의 여직원, 길가에 걸어 다니는 여성과 유치원에 가는 어린 여자 아이가 모두 같은 여자라는 생각은 애써 지우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딸들의 옷을 단속하고 아내의 붉은 립스틱에 질색하면서 술집 여자처럼 입고 다니지 말라는 으름장도 나오는 것이겠지.


문득 여고 1학년 때 학생주임이던 남자 선생님이 우리더러 '술집에 나오는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대충 그의 설명을 흘려 들었는데, 뭐 '인생 실패하면 술집 가서 술 따르게 되니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설명도 충격적이다. 용감하게도 여고에서 학생들을 술집 여자에 비유한 그 선생님은 그해 말에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시는 바람에 인간적으로 미워하기에도 어딘가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들은 그 모욕적인 말과 깡마른 모습으로 학생들 앞에 나타난 모습을 동시에 놓으면 미워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는 분열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저 인간이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망사스타킹을 입은 바바리맨과 차를 타고 나에게 그곳을 보여준 아저씨와 지하철에서 야동을 보던 아저씨, 약국에서 몰래 사온 비아×라를 찔러 넣어주는 아저씨들, 노래방에서 접대하는 아저씨들, 그런 술집 여자와 여고생을 비교하던 학생주임 선생님의 공통점은 그들이 억압된 욕구와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이상으로, 고고한 척하는 인간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돈, 권력, 지위를 가진 인간도 먹고 싸는 일은 짐승과도 다르지 않다.


마치 상체는 인간인데 하반신은 말인 켄타우로스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켄타우로스는 지혜와 의술의 상징이지만 나에게는 위선의 상징 같다. 어차피 위아래 다 동물이면서 잘난 척하지 말라고 코를 잡아 비틀어주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서 스스로 갈등하는 삶이 슬퍼 보인다. 그들의 지혜는 자신들의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일지도 모른다. 내적 갈등에서 균형을 찾는 아슬아슬한 삶이 우리 인간의 삶인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 괴롭고 슬픈 이유는 포유류의 육체를 가지고 그것을 뛰어넘는 의식을 가져서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과 슬픔이 우리를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되게 해 준다.


난 그들의 뒤틀린 욕구를 비웃고 혐오하기 전에 인간의 삶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가만히 내 몸을 더듬어 본다. 어디 한 군데 감춰놓고 뒤틀려서 고장 난 욕구가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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