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악몽과 같이 찾아왔다.

언제부터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by 구름조각

언제부터 우울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상담을 시작한 날부터일까? 내 상담 선생님은 나의 우울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어린 날 아버지에게 억울하게 뺨을 맞았던 때부터일까, 아니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남자아이들에게 놀이터에서 얻어맞은 날부터일까. 딱 집어 언제부터가 우울증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분명 내가 병들어가고 있다고 느낀 순간은 있다.


27살 독일에서 혼자 어학연수를 다녔던 때, 나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 살고 있었다. 거기엔 러시아, 토고, 우즈베키스탄, 중국에서 온 여자들이 함께 살았고 집주인은 터키에서 가족들과 건너와 정착한 40대 남성이었다. 대체로 조용한 마을이었고 근처에 호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호수로 산책을 가곤 했다.


터키인 집주인은 건축일을 하며 술집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바 형태의 조용한 마을 술집이었다. 손님이 많지 않은 그 바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폴란드인 직원이 비자 문제로 그만두게 되자 집주인은 나에게 일을 해보지 않겠냐며 물었고, 부족한 언어 때문에 간단한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던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고, 손님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손님이 없던 밤 집주인이자 바의 사장은 나에게 술을 한잔 권했고 나는 경계심도 없이 넙죽 받아 마셨다. 그 술이 보드카였던가, 데낄라였던가. 아주 독한 술에 나는 금세 몽롱해졌었다. 시간은 아마도 새벽 3시쯤이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사장이 점점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 같았고 나도 앉은자리에서 몸이 휘청 휘청 제대로 앉아 있지 못했다. 내가 기우뚱 한 순간 사장은 나를 잡아채 입술에 키스를 했고, 안쪽에 침대가 있으니 가자고 몸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경계경보가 마구 울렸고, 나는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일어섰다. 지금 생각해봐도 꽤 침착했던 것이 그 위기 상황에서 바짝 정신 차려야 된다고 생각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화장실에서 나와 집에 가보겠다며 짐을 챙겼다. 그리고 이틀 후 문자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알렸다.


유부남 사장이 술에 취한 나에게 키스했고 잠자리를 가지자며 제안. 나는 그 스킨십을 거절했고, 처음부터 원했던 입맞춤도 아니었으니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침착하게 행동했지만 공포와 수치심은 뒤늦게 찾아와 오랫동안 날 괴롭혔다.


우선 낯선 나라에서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거나 믿을만한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큰 공포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집주인을 꽤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내 판단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술집에서 그가 힘으로 날 제압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술집의 사장은 내가 사는 집의 집주인이기도 하니 마음만 먹으면 잠가둔 문을 열고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공포가 머릿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게 되자 나는 대인기피증처럼 사람을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되었다. 방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고, 때로 밖에서 날 찾는 소리에도 모르는 척했다. 수치심과 자책감이 뒤섞여 나 자신을 탓하기도 부지기수였다. '왜 순진하게 바에서 일하겠다고 했니, 왜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니. 내가 멍청하고 어수룩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던 셈이었다.


인생이 지옥이야. 끝없이 추락하는 지옥이야.


그 후로 매일 밤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누군가 귀에 대고 "지금 사는 삶이 지옥이야. 끝없이 추락하는 지옥이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바닥에 부딪혀 내 몸이 산산조각 나면 좋겠는데, 언제가 끝일지도 모른 채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또 다른 꿈에는 얼굴이 다 짓물러 생살에 피고름을 줄줄 흘려대는 흉측한 괴물이 나왔다. 괴물을 피해 도망치려 하면 바닥이 무너졌고 나는 또 끝이 없는 지옥으로 추락했다. 그런 꿈을 꾸고 눈을 뜨면 현실감각이 완전히 사라져서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고, 누워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땅이 꺼져 저 깊이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밤에는 얕은 잠에서 자주 깨었고 낮에도 항상 졸리고 피곤해서 어떤 일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문을 열면 나를 찾는 사신이 커다란 낫을 들고 서있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사실 꿈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내 현실은 몽롱했고 꿈은 생생했다.


죽음의 신이 든 커다란 낫의 이름은 '시간'이라고 한다. 시간은 공평하여 때가 되면 익은 벼의 목도, 사람의 목도 베어 간다. 문밖에 나를 찾는 죽음이 서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를,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나를 데려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내 방, 내 침대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짓눌려 갈 무렵, 새해가 왔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독일은 새해에 밤새 불꽃놀이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보고 싶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집해서 온 유학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에 꾹꾹 눌러 참다가 그 순간에 터져 버린 거겠지. 나는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이 곳에서 혼자서 버틸 수 없었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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