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던 시절 학교에서 MBTI 검사를 해서 INTJ라는 결과를 받았는데 당시 상담사가 T(사고) 점수가 상당히 높다고 얘기해줬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나 같은 사람은 육아를 하는 게 어렵다더라. 아이들의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요구 사항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근데 아이를 낳기 전부터 사회생활 곳곳에서 그런 상황들을 겪어왔다. 이성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무조건 자기의 상황에 감정 이입해주길 바라는 경우. 그럴 때 내가 냉정하게 전후 사정을 따지거나 잘잘못을 가려내면 나보고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공감능력이란 자기편 들어주기이고, 대화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조건 맞다고 맞장구쳐주는 것이다. 또한 그저 공감해주는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가만 보면 타인을 감정의 쓰레기통쯤으로 생각해서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만 배설하고 핵심적인 문제 원인은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있자면 말 그대로 지인지조(지 인생 지가 조진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 사람들은 또 고집이 세서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보지 않겠냐고 말해주면 "나도 내가 문제인 건 알지만, 상담은 받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더라.
'나도 내 문제가 아닌 네 문제에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싶지 않고, 스스로 무덤 파겠다는 사람 말릴 만큼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네 말이 맞다고 오구오구 해줄 애정도 없단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난 사회화된 INTJ니까.
심리상담을 받으면 앉아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1시간에 10만 원, 15만 원씩 한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한 시간에 100만 원의 상담비를 받기도 했다는데, 이 바닥도 부르는 게 값인 건지 아니면 그 금액만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그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을 유추해서, 적절한 조언을 주는 것 자체가 상당한 감정노동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1시간에 10만 원 정도의 값은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5000원짜리 커피 한잔이나 사주면서 자기 얘기만 3-4시간씩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곤란하고 기 빨리는 상황 중 1순위는 남의 연애 상담이다. 어차피 헤어지지 않을 거면서 그냥 자기의 연인을 깎아내리면서 본인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알량한 우월감 좀 채워보겠다는 심보가 낭낭하다. 그런 애들이 말끝에 "근데 너는 참 괜찮은 애인데 왜 남자 친구 안 사귀니?" 이따위의 발언을 남긴다는 게 아리송하다.
'왜냐니, 너처럼 골치 아픈 관계에 휘말려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이 말도 속으로 씹어 삼킨다. 난 사회화된 INTJ니까.
사람은 AI가 아니라 100% 객관적이지 않다.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의 상황에서 각색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재해석해서 전달한다. 또 인간 심리에는 확증편향이라는 게 존재해서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래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믿는 것' 또는 '그 사람의 머릿속 생각'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또 사람은 참으로 간사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은 축소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은 확대해서 말한다. 괜히 법정에서 '증거 재판주의'를 채택한 게 아니라고. '증언'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증거재판주의(證據裁判主義)란 반드시 증거에 의해서만 사실 인정을 허용한다는 주의로 형사소송에서의 원칙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 문장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세상에는 딱 세 가지의 문제만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문제이며, 마지막 하나는 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의 생사나 시간의 흐름, 우주의 존재 이유 같은 문제들이 신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들에 개입하는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 문장의 정확한 출처를 찾으면 추가하겠습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유레카를 외쳤는데, 내 인생이 꼬이는 이유에 대한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문제가 아닌 것들을 고민하고 걱정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내가 해결해야 할 내 문제들이 관심밖에 있었다. 부모님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남자 친구가 회사 일로 힘들어하는 것도 남자 친구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에게 운명이란 게 존재하는지, 아니면 죽음 이후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는 내 능력으로 알아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 문제들을 꼭 쥐고 괴로워하면서 남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머리를 굴리다 보니 나 자신이 먼저 지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관찰한 결과, 많은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그리고 나에게 통했던 방법들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통한다는 법은 없었다. 사람은 다들 각자의 방향과 속도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어 자신의 방법을 찾을 권리가 있다.
내 조언은 타인에게 큰 영향력이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한 후부터 다른 사람의 고민에 감히 조언을 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에 더해 타인의 문제에 너무 감정 이입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누군가 하소연하거나 자기의 고민을 읍소해도, 그저 우아하고 산뜻하게 "그렇군요."라고 대답한다. 그 문장에 숨겨진 말을 채워 넣으면 사실 이런 말이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군요."
"(당신의 감정이) 그런가요?"
"(당신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네요."
이 중 어떤 말에도 만족하지 않고 헛소리 하면서 남들을 가르치려 들거나, 앞뒤 없이 자기감정만 폭발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침묵한다.
내가 아무리 사회화된 INTJ라도 개소리에 동의해줄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