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그런 순간의 인상을 포착해서 글을 쓰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내 글을 '인상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날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수련을 연작한 모네의 그림처럼, 일상의 순간에서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내가 쓰는 에세이의 특징이다.
약국에서 일하면서 만난 두 아이의 엄마도 그런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여느 때와 같이 바쁘게 조제실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두 명의 남자아이도, 그 엄마의 얼굴도 한번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굳이 조제실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본 이유는 두 아이의 처방전 때문이었다.
9살, 5살 두 남자아이 모두 간질환자였다.
어린 아이라 모두 물약을 처방받았기 때문에 두 종류의 물약병을 60병씩 가지고 가야 했다. 그 말은 키 작은 엄마가 양 손으로 120병의 물약을 들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전에는 간질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 있었을 뿐이고 실제로 간질을 앓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생애 처음 간질환자를 봤는데5살, 9살짜리 어린아이라니... 왠지 내가 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라고 병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약국에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서로에게 장난을 치는 형제를 보면 왠지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처음 아이들이 모두 간질을 앓고 있다는 처방을 들었을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평소보다 더 꼼꼼히 약의 유통기한과 약병의 개수를 살피면서, 아이들과 함께 120병의 물약을 들고 가는 원더우먼 같은 엄마의 뒷모습이 인상 깊었다. 영화에 나오는 원더우먼처럼 가녀린 팔뚝과 허리에서 저런 힘을 내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 약국에서 일하는 동안 종종 그런 엄마들을 많이 보게 됐다. 어느 날은 ADHD를 앓는 아이들을 위한 약을 준비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태어나자마자 갑상선 기능 항진에 걸린 신생아를 위한 약을 준비하기도 했다. 지름이 채 3mm도 되지 않는 작은 갑상선 호르몬제를 또 ¼로 잘게 잘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생아의 작은 몸에는 조금이라도 큰 알약이 치명적일까 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같이 일하던 직원들 중에 아이들이 있는 직원들은 그런 처방전을 볼 때마다 다짐한다고 했다. '우리 아이가 건강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고.'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그저 내 아이가 건강하고 명랑하게 자라는 것이 진짜 복 받은 일이라는 것을 약국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고통으로 나의 행복을 알아채는 것이 일견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늘 그렇다. 이미 손에 쥔 행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그것이 진정 행복이었다는 것은 잃고 나서 깨닫든지, 잃고 나서 괴로워하는 타인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두 번째 엄마는 내가 손님으로 찾아간 다른 약국에서 본 사람이다. 처방전을 주고 약을 기다리는 중에 앞에서 한 보따리의 영양제를 사고 있는 학부모를 본 것이다. 피로 해소에 좋은 비타민, 눈 건강에 좋은 루테인, 눈 떨림에 먹는 마그네슘, 피로 해소에 좋은 영양제, 집중력 향상에 도움되는 약 등등 종류도 다양하게 고르고 있었다. 그중에 그 엄마와 약사의 대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약사님, 근데 우리 애가 고2인데 아침에 눈을 못 떠요."
"너무 피곤해서요?"
"네~ 매일 아침에 피곤하다고 아침에 못 일어나요. 도움되는 약이 없을까요?"
"보통 하루에 몇 시간쯤 자는데요?"
"하루에 4시간 정도 자요."
"아... 4시간이요? 수면시간이 너무 짧은데요..."
동공 지진하던 약사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참 아쉽다. 그런데 수면시간이 너무 짧다는 말에도 그 엄마는 화통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애가 자사고 다녀서 어쩔 수 없어요. 다른 애들 쫓아가려면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데요!"
그 말에 약사도 다른 영양제를 하나 더 추천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면시간이 너무 짧으니 조금 더 재우라는 말을 잊지 않기는 했다. 영양제만 30만 원어치 정도 사가던 엄마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에 뿌듯한 걸까? 아니면 아이를 위한 영양제를 산 것에 뿌듯한 걸까?
'사랑'이라는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는 그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사랑이란 단어로 대화를 해도 서로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모성애'라는 단어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마다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제3자인 내가 그 두 명의 엄마를 보고 한 사람은 모성애고 한 사람은 집착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앞뒤 상황을 자세히 모르니 그날 본 한 장면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건 건방진 일이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 하루에 4시간 자는 아이를 위해 한 보따리의 영양제를 사가는 엄마의 모습에 두 아들의 간질약을 한 보따리 사가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졌다는 건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그저 아이들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던 약국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도.
누군가에게 간절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마니 참 우스운 일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불공평해 보여서 한숨이 난다. 한 명의 엄마에게 간절한 내 아이의 건강이 다른 한 명의 엄마에게는 학교 성적에 밀리는 것이니 말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이미 고민스럽다.
정말로 내 아이를 위하는 일이 무엇일까?
실제로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이에게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줘서 고맙다고 말할 깜냥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