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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l 19. 2021

도세권이라는 말 아세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는 미니멀리스트의 선택

    우울증을 겪으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잘못된 거라면 분명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떠올린 것 중 하나가 너무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사는 삶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쌓아 놓은 집이 마치 잘못된 관계에 얽매여 있는 내 모습 같았고, 이미 지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 같았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선택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제일 먼저 버린 것은 침대였다. 12살부터 써왔던 침대는 이미 프레임 곳곳에 균열이 생겼고 매트리스에는 내 엉덩이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엄마는 엉덩이가 커서 매트리스가 무너지는 거라며 놀렸지만 한 매트리스를 15년째 쓰는데 그 정도 무너짐도 없겠냐며 받아쳤다. 묵묵히 혼자 프레임을 분해하기 시작했고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한 엄마도 합류해서 함께 침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침대를 버린 자리에는 말아 놓을 수 있는 매트리스를 가져다 놓았다. 잘 때 펴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말아서 세워 놓았다. 매일 매트리스를 말아서 세워 놓으니 작은 방이 갑자기 확 넓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간과했던 사실이 내가 잠자리에 예민하다는 점이었다. 


    바닥에 너무 가까우니 그만큼 천장이 너무 높아진 게 왠지 익숙하지 않았고 허리가 불편해서 자고 일어나면 안방 침대였던 적이 많았다. 잠결에 나도 모르게 안방의 넓은 침대로 가서 누운 것이다. 몸소 침대라는 가구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이라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옷과 화장품이다. 여성의 사치품 중 양대산맥인 옷과 화장품. 옷에 별로 관심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옷장을 탈탈 털어보니 몇 년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많았다. 이미 낡은 티셔츠도 언젠가 잠옷으로 입겠다며 구겨놓았고, 사놓고 몇 번 입지 않았던 옷도 많았고, 결정적으로 언젠가는 살을 빼서 입겠다며 아껴놓은 옷이 여러 벌이었다. 


    살을 빼겠다고 다짐했으나 그동안 지키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지키지 못할 확률이 높다. 또 열심히 노력해서 살을 뺐더라도 옛날 옷보다는 예쁜 새 옷에 눈이 갈 테니 안 입는 옷을 계속 아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입지 않는 옷들을 모두 처분하기 시작했다. 


    화장품은 또 쓸데없이 많아서 주변 친구들에게 많이 나눠줬다. 당장 내가 안 쓸 거라도 남이 준다면 넙죽 받는 것이 아이섀도 팔레트 같은 것들이다. 가루니까 조금 오래되도 찝찝하지도 않고 가격도 제법 비싸니까 누가 공짜로 준다면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쓰는 화장품을 친구들에게 주고 커피 한잔씩 얻어 마시면 그게 나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크림 타입 블러셔나 액체류는 균에 오염되었을 수 있으니 다 버렸다. 아깝기도 했지만 깨끗해진 화장대를 보면 의욕이 다시 생겼다. 


    세 번째로 제일 막노동이었던 것이 을 버리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아이들 책 사주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덕에 집에 책이 많았다. 그러나 책이라는 게 한번 읽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는 경우도 많지 않고 오래 묵은 책들은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읽을 수도 없게 되었다. 


    청소년들이 읽는 전집이나 백과사전은 시골에 작은 어린이 도서관에 기부했다. 어릴 적 추억이 떠나는 것이 왠지 쓸쓸해서 아쉬운 소리를 좀 했더니, 도서관 관장님이 직접 농사지은 사과 한 봉지를 가져다주셨다. 깨끗한 책 기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고 말씀해 주시니 내 좁은 마음이 풀어지는 듯했다. 


    쓸만한 단행권들은 중고 서적으로 팔고 받은 돈이 꽤 쏠쏠했던 걸로 기억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집에서 핸드폰으로 스캔하면 이 책이 팔릴지, 안 팔릴지, 가격은 또 어떻게 책정될지 미리 알 수 있었다. 돈이 될만한 것들만 추려 단단히 묶어서 중고서점에 팔고 나니, 정말 오래되고 아무도 읽지 않은 책만 남았다. 


    정작 책장에 남은 책들은 추억이 얽힌 책들이다. 1991년부터 모아 온 이상 문학상 단편소설집은 아버지께서 매년 사 모으신 것이다. 출장을 가실 때 기차역에서 그해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사서 기차 안에서 소설 몇 편을 읽곤 하셨다. 그 피를 받은 모양인지 남동생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소설을 쓰고 있다. 보고 자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이 책들은 팔아도 값어치가 없고 오직 우리 가족에게만 가치 있는 것이라 남기기로 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쏙 빼닮은 동생이 모은 젊은 작가상 작품집과 신춘 문예지, 시집도 남겼다. 그리고 내가 두고두고 읽을 책들 몇 권과 엄마가 아끼는 책들을 남겨 두니, 남은 책들은 전혀 공통점도 없이 책장에 꽂혀 있다. 전집이 빼곡했던 책장보다 보는 멋은 없지만 내용은 알찬 책장이 되었다. 


    책을 많이 처분한 후에도 책 읽기는 놓지 않아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고 있다. 집 근처 도서관이 개인 책장인 셈이다. 요즘 도서관은 서로 연계도 잘 되어 있어서 다른 도서관의 책도 집 근처 도서관으로 배송해준다. 그럼 멀리 책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인터넷이나 어플로 보고 싶은 서적을 신청하면 다음 달 희망도서 구매 목록에 올려주기도 해서 새 책을 사지 않고 읽어 볼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일한 덕에 이런 서비스들을 알게 되어 알차게 써먹고 있다. 도서관의 책들은 당연히 밑줄을 긋거나 책 귀퉁이를 접어 놓을 수 없지만, 난 전에도 책을 깨끗하게 읽는 습관이 있어서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대신 나중에라도 다시 읽어볼 수 있도록 좋은 문장은 블로그에 정리해두고 있다. 


    요즘 꿈꾸는 것은 도서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는 삶이다. 혼자 살면 화분 몇 개와 단정한 가구 몇 개만 둔 조용한 집을 꾸미고 싶다. 그리고 집 주변의 역세권만큼 도세권을 따질 것이다. 나에게는 도서관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지가 버스정류장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지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선택하고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무엇에 만족을 느끼는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나니 무엇이 귀한 것인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찾은 기준으로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겼다. 


어쩌면 행복을 찾는 가장 빠른 길은 불행을 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길은 불필요한 생각들을 비우는 것이고,

물욕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더 이상 사지 않는 것에 있을 것이다. 


    아무리 채워도 밑 빠진 독처럼 헛헛하던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더니 비로소 그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멍을 메우고 나서 새로 마음에 담는 것들은 좋은 것들만 조심조심 담고 싶다. 좋은 책의 좋은 글귀,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즐거운 시간, 아름다운 음악과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 이런 지혜들을 배우기 위해 우울증을 앓았던 것이라면 마음의 병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수업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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