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헤어지고 얼마 뒤 늦은 오후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보니 tv에 <이터널 선샤인>이 방영되고 있었다. 로맨스 영화의 영원한 고전, <이터널 선샤인>을 이미 4~5번은 본 지라 중간부터 봐도 충분히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어서 얼굴이 달덩이만큼 부었다. 콧물을 찔찔 흘리는 내 얼굴을 엄마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사랑이 끝난 후 남은 기억에 관한 영화였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어버린 건 나의 사랑에는 남길만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애라는 걸 한지 8개월쯤 되는 시점에 그는 갑자기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내 자존심이 산산조각 난 것은 물론이고 함께 했던 추억까지 다 박살 났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기억을 지우기 시작하니까 클레멘타인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에 홀로 남겨졌던 조엘처럼, 그와의 기억에서도 나만 혼자 남겨졌다.
그의 손가락을 깨물면서 장난을 쳤던 침대에서도 혼자 남겨졌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부엌에서도 나 혼자 남겨졌고,
같이 신나게 놀았던 동전 노래방에서도 나 혼자 남겨졌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랑이 아니고 나 혼자만의 착각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사랑이 끝났다고 하면 사랑이란 놈이 워낙 변덕스러워 어제오늘의 마음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고마웠다." 인사하며 담백하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라고 하니 속에서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야! 그럼 우리가 이때까지 한 건 뭔데?
내가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서 울었던 건 나에게 그리워할 지난 사랑의 기억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혼자만의 착각이 되어 버렸으니, 제발 지우지 말아 달라고 빌 만한 추억이 없었다. 그래서 더 헤어진 그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진실하게 사랑했다고 끝까지 거짓말해주지 그랬니.' 그럼 인생에서 한때 불같이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추억할 거리라도 남길 수 있었잖아.
그가 날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의 애틋했던 눈빛도 내 착각이었으니 삭제.
그가 내 집 앞에 와서 함께 밥을 먹고 카페에서 오래 이야기 나누었던 날도 내 착각이었으니 삭제.
그가 나에게 편지를 건네주면서 수줍게 웃었던 날도, 그 편지에 적혀있었던 '더 잘해주겠다'는 약속도 다 내 착각이었으니 삭제.
삭제.
삭제.
삭제.
많지 않은 기억을 지우고 나니 그와 만났던 1년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통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가끔 년도가 헷갈리는 건 그때 지운 기억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그와 헤어질 때 "너의 그 '사랑을 모르겠다'는 말이 가장 치명적이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가 다음 여자에게도, 그다음 여자에게도 똑같이 경솔하게 말을 뱉어서 또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면 좋겠다.
운이 좋으면 마음이 깊은 바다 같아서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겠다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고, 운이 더 좋다면 성격이 대단한 여자를 만나서 경솔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좋겠다. 그러면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복수를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 마저도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초연해질만큼 많은 것들을 지웠다. 마침내 그와의 마지막 통화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남친 : "가끔씩 네 생각이 나서 보고 싶은 감정이 들곤 해."
나 : "감정이야 파도처럼 왔다 가는 거니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그때는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해도 금세 괜찮아졌을 거잖아?"
전남친 : "... 맞아."
그럼 그렇지. 내가 아는 너는 감정이 그리 깊지 않은 사람이다. 나와 전화를 끊고 샤워를 한번 하면 금세 수돗물에 나에 대한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고, 너에게 많은 걸 배운 나도 그렇게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나도 눈물 한 방울에 그 감정을 개운하게 흘려보냈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남길 추억이 없어서 그를 빨리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눈과 코를 성형 수술하고 온 그의 얼굴도 크게 한몫을 했다. 보자마자 천년의 미련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는 쌍꺼풀 수술이 잘 되었다고 자랑을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잘못 찝힌 쌍꺼풀과 어색하게 높은 콧대도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나를 몰랐으면 내가 그의 물고기 꼬리처럼 길게 접히는 외꺼풀의 눈을 사랑했다는 걸, 수더분하고 듬직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다는 걸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