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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Apr 23. 2021

나의 여성성에 대한 짧은 글

당신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나요?


    우울증 상담 때 "내 인생의 빌런(villain)들을 찾아서 그들을 이해하는 걸 넘어,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워지고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들에게서 자유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내 인생의 빌런(villain)들이 누구였는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거의 다 남자들이다. 사실 나는 '남성성' 그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내면 깊이 숨겨진 적대감이겠지. 인류의 절반이 빌런(villain)으로 느껴진다니, 삶이 팍팍할 만도 하다. 내가 거의 자동적으로 얽매여 있는 편견들이 몇가지 있다.


-남자는 여자의 인생에 아무 쓸모가 없다

-결혼은 여자의 삶을 힘들게 한다

-여자가 돈만 잘 벌면 남자는 필요없다

-남자는 여자에게 위협적이다


    이런 편견들의 뿌리는 어디일까. 실제 내 인생의 경험이었기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명확한 기준이 없기도 하다. 뚜렷한 근거나 사건도 없이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이 생각들은 어디서 왔을까.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외할머니는 불교신자인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절에 가서 봉사를 하고 기도를 하신다. 나는 어렸을때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여자로 안 태어날 거다. 남자로 태어나서 지금처럼 보잘것 없이 살지 않고, 아주 멋지게 살거다."


    약간의 분노와 비장한 각오 같은 것에 처연한 슬픔이 뒤섞여 있던 목소리. 외할머니의 삶은 항상 설움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닥 능력도 집안도 좋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만나서 외할머니가 고생을 꽤 하셨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장사 수완이 좋아서 생선도 내다팔고 방앗간도 하면서 솔찬히 돈을 모으셨다. 물론 그렇게 가계를 일으키는 동안 어린 자식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면이 다분하다. 그래서 우리집은 명절마다 과거사 한풀이로 시간 갈 줄을 모른다. 나의 엄마는 맏딸로 동생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느라 자기 키가 작은 거라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이렇게나 열심히 살았던 할머니는 그래도 옛날 사람이라 애써 번 그 돈을 고스란히 남편 몫으로 묶어 두었다. 지금까지 시장에라도 가려면 외할아버지께 아쉬운 소리를 하며 한푼 두푼 받아가야 한다. 그때마다 경제권을 쥔 외할아버지가 괜히 호통을 치면, 외할머니는 그게 못 견디게 자존심이 상하는 거다. 열심히 벌었더니 그 돈이 고스란히 남편 손에 들어간 게 억울하고 원통하시다. 외할머니는 그 설움이 다 자기가 여자로 태어나서 그렇다고 생각하신다. 여자로 태어나서 못 배우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게 진절머리 치도록 싫으니, 다음 생애는 반드시 남자로 태어나서 멋지게 사는게 외할머니의 계획이다.


    이런 할머니와 살았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어린 아이들은 사고 능력이 충분히 자라지 않아, 타인의 '견해'와 '사실'을 자주 혼동한다. 특히 주양육자의 '견해'는 어떠한 검증과정 없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심어지기 쉽다. 외할머니의 '견해'는 고스란히 '사실'이 되어 깊숙한 내면으로부터 '편견'으로 자랐다.


-여자는 남자 때문에 힘들게 산다

-남자 없는 삶이 훨씬 행복하다

-남자에게 기대는 삶은 비참하다

-남자는 여자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살면서 실제로 겪은 일보다 훨씬 더 괴로운 생각이 되어서 나를 괴롭힌다. 여자로 사는 게 힘들다는 편견에 사로 잡힐수록 나는 내 성을 혐오한다. 여성인 내가 나의 여성성을 혐오하는 것이다. 여자로 태어난 게 잘 못이라고, 그래서 내가 사는 게 힘든거라고 생각한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훨씬 잘 살거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남자의 삶이 어떤지는 몰라도, 막연히 그렇게 믿는다. 이런 모습이 한가지 생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사람의 패턴인 것 같다. 나에게 권위 있는 혹은 중요한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 내가 색안경을 끼고 있다고 말한다면, 인정한다. 근거없고 지극히 주관적인 색안경이다. 변명하자면 내가 만난 사람중에 이런 색안경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색안경이 점점 짙어진다. 이내 눈앞을 가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하고, 자기말곤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고집 센 뒷방 늙은이가 되고 만다. 


    아기들의 맑은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직 그 아이들의 눈에는 색안경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투명한 세상을 보고 사랑을 마음껏 표현한다. 불과 3살이면 그 순수한 눈이 어른들의 편견에 전염되어 물드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이런 세상이 덧씌워놓은 편견들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고 내 삶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건 니체가 말하듯 다시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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