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씽크빅이아니라 구몬이다

창의력 보단 꾸준함이 빛을 발하는 세상

by 구름조각

어린 시절에는 방문 학습의 종류가 많았다. 눈높이 재능 교육, 윤선생 영어 교실, 빨간펜 학습지도 있었고, 어린이들의 적 구몬 학습도 있었다. 나는 다른 건 다 싫어했지만 씽크빅만은 좋아했다. 매번 새롭고 다른 문제를 푸는 게 재밌었고 나에게 꽤 창의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계산을 지겹게 반복하는 구몬 학습 같은 건 정말 괴로웠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는 창의력 교육이 성행해서 창의력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선행학습에 불과했던 것 같지만,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덕에 과학실험이나 논리적 사고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걸. 대학교 입시에는 창의력보다 성실하게 정해진 분량을 머리에 채우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말이다. 중학생 까지 배웠던 창의력 교육은 고등학교에서 아무런 빛을 발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복학습에 취약하다는 게 극심한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입시생 시절 3년 내내 소화불량과 위장장애를 달고 살았다.

대학교 공부는 오히려 쉬웠다. 내가 주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적어도 교양 과목 등은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어, 철학, 미술사, 건축, 환경계획 같은 수업들을 선택해서 들었다. 내 정신이 풍성해지는 시간이었다. 대학시절에서 제일 아쉬웠던 건 전공수업과 서양 미술사 강의가 시간이 겹쳐서 고민하다 전공과목 수업을 들었던 점이다. 전공과 관계없이 사는 지금을 생각하면 그때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었어야 했다. 서양미술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전공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난 언제나 해야 하는 일하고 싶은 일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지나고서야 늘 후회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후회를 남기지 않는 법이다. 특히 학생 때라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던가.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운전도 할 수 있고, 술도 마시고, 연애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른이 되고서야 많은 자유에는 예상보다 더 큰 위험이 따른다는 걸 깨달았다. 운전을 하려면 차를 살 돈도 있어야 하고, 유지비를 감당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술을 마시는 건 자유지만 그러다가 건강을 해치거나 사고를 치면 고스란히 내 책임이다. 연애는 늘 어렵고 사람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깊다. 아이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들은 그것들이 너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은 사랑의 열기에 쉽게 데고 말 것이다. 14살, 16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다.


20대에 어른의 삶에서는 반짝이는 창의력보다는 꾸준하게 버티는 인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그것을 끝내 현실화하는 것은 여러 번의 실패에도 주눅 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도전하는 인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남겼겠는가.


모든 전사 중 가장 강한 전사는 이 두 가지, 시간과 인내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여 책을 쓴 사람에게도 시간과 인내가 가장 중요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몬을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구몬 학습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정해진 분량의 학습지를 끝내면 느끼는 성취감과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던 어린 시절 말이다. 인생의 유일한 고민이 밀린 학습지였던 시절. 그때를 그리워하는 걸 보니 나도 완전히 어른이 된 모양이다.


아마 지금 구몬을 시작하면 이런 변명을 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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