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에게는 어린시절이었겠지
동생의 친구네 부모님께서 은퇴를 하시고 집에 80인치 tv를 사놓으셨다고 한다. 그 80인치 tv로 전원일기만 보신다길래 '이게 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합'이냐고 크게 웃어버렸다. 80인치라는 크기가 가늠이 안되어서 이미지를 찾아봤더니 말문이 턱 막힐 지경이다. <전원일기> 같은 농촌 드라마는 옛날 시골집에 있던 앞 뒤가 두꺼운 옛날 '텔레비전' 같은 게 어울리지 않나? 최신식 초대형 tv로 <전원일기>를 보면 뭔가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 21일부터 2002년 12월 29일까지 총 1088부작으로 만들어진 MBC 드라마다. 자료를 찾아보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라고 의아했다. 아마 <전원일기>가 끝난 후에도 외할아버지께서 계속 재방송을 찾아보셨기 때문에 아주 근래까지 방송된 것처럼 느낀 것 같다. 장수 프로그램에다 농촌 생활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성 드라마라 어르신들에게는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거기다 옴니버스 형식이다 보니 각 회차가 단편적으로 완결된다. 순서대로 보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고 등장인물 성격만 파악하면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쉽다는 장점이 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1939년 생이시고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이다. 종종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들어보면 다이너마이트를 강에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는 둥, 친구들과 야산에 수류탄 고리나 탄피를 모으러 다녔다는 얘기를 듣는다. 세월이 지나 과장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 시절 상황을 이해하면 영 없을 법한 일도 아니다. 땅에 묻혀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강에 던지면 폭발의 충격으로 물고기들이 배를 보이고 둥둥 떠오른다고 한다. 그러면 떠오른 물고기를 건져 오기만 하면 되니 위험천만하고도 확실한 고기잡이인 셈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안전하고 평화로웠는지를 생각하며 안도하게 된다. 전쟁 길의 피난이나 궁핍한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르신들이 요즘 애들 보고 너무 여리다고 혀를 끌끌 차는 게 이해도 된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큰 모험이라 해도 버스에서 깜박 졸아 버스 종점에서 길을 헤매었던 일이나 밤새 친구들과 공원에서 쏘다닌 일이 전부였으니... 나는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린이여서 남자애들이 장난감으로 거칠게 놀기라도 하면 바로 선생님을 불러오는 얄미운 여자애였다.
성장배경이 다르다 보니 <전원일기>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외할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께서 <전원일기>를 정주행 하는 걸 보면 갑자기 세대 간 격차가 심각하게 느껴진다. 어머니의 정서가 나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랄까? 어머니는 분명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언니 성보라와 비슷한 배경을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84학번, 어머니는 86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으니 88년도에 한창 대학생으로 청춘을 즐기던 때였다. 그리고 두 분 다 대구광역시에서 도시생활을 했다. 그런 어머니께서 <전원일기>에 공감하고 이야기에 빠져든다는 것이 의아할 때가 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에 저런 시골 풍경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나에게 남은 단편적인 기억으로는 시골집에서 본 소의 커다란 눈망울과 마당 한편에서 숫돌에 칼을 갈아주던 할아버지와 낡은 시골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구수한 냄새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소한테 여물을 주려고 해도 생각보다 소 혓바닥이 길어서 무서워했던 것 같다. 명절날 잠깐 들렀던 시골집의 풍경이 오래 남은 것은 도시에서 태어난 내가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감각들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소의 커다란 눈, 숫돌에 칼을 갈 때 나는 서걱서걱 날이 선 소리, 흙과 거름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같은 감각적 기억들이 남았다. 그렇지만 그런 감각들을 떠올리면서 봐도 <전원일기>의 내용은 너무 고리타분하다. 며느리들에게 효도를 기대하며 재산을 물려줄지 말지 고민하는 시아버지나 남편들이 아내에게 거칠게 윽박지르면서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는 장면은 굉장히 불편해진다. 요즘 드라마에서 저런 장면이 나오면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글이 올라와서 서버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전원일기>도 방영 당시에 몇 번 가부장적 소재 때문에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농촌을 배경으로 다루는 만큼 도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전원일기>의 1화 제목은 '손뼉 칠 때 떠나라'였지만, 마지막화의 제목은 '손뼉 칠 때 떠나려 해도...'로 끝났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아마 제작자들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렇게 오랜 기간 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2021년에 다시 <전원일기>로 회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태어난 자리에 돌아오고 싶어 한다더니 과거의 정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바다를 헤엄치던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그런 귀소본능이 있는 것 같다. 그럼 나도 더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겠지. 대가족이 북적이며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풍경 같은 것. 내가 늙을 무렵에는 불가능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도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려나? 그 날을 위해 <응답하라2002>가 제작되면 좋겠다.
※네이버 블로그에 <전원일기> 재방송 편성표를 링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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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tv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