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채워줄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
분명 독일에서 경험한 오리지널(?)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을 위한 명절이었다. 곳곳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들뜬 분위기, 성탄절 조명들이 화려하게 밤거리를 수놓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혼자 이국 땅에서 고군분투하던 나는 한국의 가족들이 그리웠을 뿐 싱글이어서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을 위한 날로 변해서 '솔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매년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30대의 딸이 부담스러운지 작년부터는 엄마도 '올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느냐'라고 물어보신다. 그럼 넉살 좋게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는 날이지!"라며 애교를 부려보지만 엄마의 눈빛이 복잡해 보이기만 한다. 어느새 엄마의 지인들 대부분이 아들 딸을 '치워 버리고'(엄마 친구들은 자식들 결혼을 치운다고 표현한다. 세상에... 난 쉽게 치워지지 않을 테다!) 큰 숙제를 해치운 것처럼 크게 한턱을 쏘신다. 여러 번 그런 자리에 참석하고도 의연하게 결혼을 재촉하지 않는 엄마에게 감사할 뿐이다.
어차피 올해도 솔로 크리스마스 확정이라면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나는 로맨스 영화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현실이 시궁창일 때는 자고로 꿈과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진리인 법이다.
2006년 개봉작 <로맨틱 홀리데이>에서는 젊고 사랑스러운 카메론 디아즈(아만다 역)와 케이트 윈슬렛(아이리스 역)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머리숱이 풍성한 전성기의 주드 로(그레엄 역)의 매력에도 흠뻑 빠질 수 있다. 아 물론, 늘 코믹하기만 했던 잭 블랙(마일스 역)의 의외로 로맨틱한 모습까지도!
같은 신문사의 논설위원과 사귀는 아이리스. 전직원이 아이리스의 사랑을 눈치채고 있다. 그런 중에 아이리스가 사랑하는 남자는 무려 크리스마스 휴가 전에 같은 회사의 다른 여직원과 결혼을 깜짝 발표한다. 연인의 배신에 좌절한 아이리스는 펑펑 울면서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어 한다.
같은 시각 L.A. 에서는 성공적인 영화 예고편 제작회사 대표인 아만다가 젊은 회사 직원과 바람난 남자 친구를 막 쫓아낸 참이다. 자신의 집에 얹혀살면서 바람까지 피운 남자 친구에게 길길이 날뛰고 화를 내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애써 눈물을 짜내다 실패하고는 어딘가 멀리 휴가나 떠나겠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순진한 영국 여자 아이리스와 워커홀릭 미국 여자 아만다는 서로의 집을 바꾸는 홈 익스체인지(home-exchange)를 하기로 한다. 충동적인 결정이지만 완전히 다른 집, 라이프스타일과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영화의 결말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두 딸을 키우는 싱글 파더 그레엄과 L.A. 에서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아만다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왔다. 특히 눈물이 많은 그레엄과 15살 이후 한 번도 울지 않은 아만다는 성격도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만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족이 부서진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숨어 있었다. 그레엄의 딸과 포근한 집에서 어린 시절이 가족을 찾은 듯 안정감을 느낀 아만다. 마침내 이별하는 택시 안에서 그동안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사랑을 확신한다.
사랑의 깊이는 이별의 슬픔으로 확인하는 법이다. 어쩌면 아만다는 가장 끈끈했어야 할 가족이란 관계가 갑작스레 깨진 것에 대한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깊이 사랑하고 너무 소중하게 아끼는 것은 그만큼의 아픔과 두려움을 가져오기 마련이니까. 그레엄과의 관계와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결핍을 채운 아만다는 사랑에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둘은 서로 너무 달랐지만 그랬기에 서로의 빈틈을 꼭 맞게 채워준 것이 아닐까?
90세의 할아버지가 혼자 길가에 서 있는 것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리스. 그녀가 얼마나 상냥하고 헌신적인 성격인지 모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게 타인의 필요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태도는 아이리스의 매력이지만, 나쁜 남자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마일스도 마찬가지. 아만다와 그레엄이 서로 너무 달라서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관계라면, 이 둘은 '드디어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 관계인 것이다.
착한 남자는 착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나쁜 남자가 착한 여자를 만나거나 착한 남자가 나쁜 여자를 만나 인생이 꼬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타인을 이용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이타적인 사람들의 배려심과 진심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일수록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하지만, 그건 관계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으로만 배울 수 있다. 아이리스가 지긋지긋한 전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환호성을 지를 때 함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독한 악연에서 벗어날 때의 그 해방감! 빚을 청산한 것과 같은 그 기분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집을 바꾸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두 주인공들이 조금 더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평범한 로맨스 영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아늑한 영국의 작은 시골집 풍경과 L.A. 의 대저택을 번갈아 보는 재미도 있다. 코로나 이전 시대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솔로 크리스마스를 채워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