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사랑을 다시 쓰며... <어톤먼트>
백신 맞고 골골대는 중에 누워서 즐길만한 영화를 한편 봤다. 그렇게 누운 자리에서 <어톤먼트>의 제임스 맥어보이에 반하고, 그가 출연한 <비커밍 제인>을 보고, 제인 오스틴이 쓴 동명의 소설로 만든 <오만과 편견>을 봤다. <어톤먼트>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소설가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마지막 반전까지 본 후 소설가의 사랑법에 대해 알고 싶어 졌고 제인 오스틴의 실제 사랑이야기를 각색한 <비커밍 제인>을 본 것이다. 제인 오스틴 역을 연기한 앤 해서웨이와 그의 연인, 톰 리브로 이를 연기한 제임스 맥어보이에게 푹 빠졌다. 그 후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을 영화로 보고 싶었다. <어톤먼트>의 키이라 나이틀리로 시작해서 <오만과 편견>의 키이라 나이틀리로 끝난 하루였다. 공교롭게도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의 감독 모두 조 라이트 감독이었다.
모든 영화가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비극적인 이야기인 <어톤먼트>에서 현실적인 이야기 <비커밍 제인>을 보고 다시 해피엔딩으로 끝난 <오만과 편견>까지의 선택도 좋았다. 영화 3편을 연달아 보고 나니 하루가 다 지나 있었고 머릿 속도 복잡해졌다. 이 수많은 사랑이야기에 대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어긋난 사랑에 대한 속죄와 소설가의 사랑법과 사랑의 목적에 대해서 말이다.
2007년 개봉 당시에 <어톤먼트>라는 제목을 한국어 그대로 번역했다면, 눈치 빠른 관객들은 영화의 반전을 예측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은 죄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언 매큐언의 2001년작 『속죄(atonement)』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고 상업적으로도 흥행했고 평단의 호평뿐만 아니라 제65회 골든 글로브상 영화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영국군의 덩케르크 후송 작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의 긴 롱테이크 촬영인데 거의 5분가량을 카메라 장면이 전환되지 않고 전장의 참상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이 당시 영국군은 나치 독일군의 포위를 피해 영국으로 철수하는 작전을 펼쳤는데 프랑스 도버 해협의 작은 도시 덩케르크에서 철수작전을 벌였다. 이국 땅에서 전쟁에 지쳐 있던 영국 군인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인 동시에 최후의 동아줄 같은 작전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상황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2017년 작품 <덩케르크>에 잘 표현되어 있다.
브라이오니 탈리스(시얼샤 로넌/로몰라 가레이/버네사 레드그레이브)
사건의 흐름에 따라 13살, 18살, 77살로 등장한다. 자신의 언니와 로비가 성적인 대화와 관계를 나눈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로비를 짝사랑하던 마음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해서 로비를 사촌의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사실상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된 인물이다. 이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간호사로 일을 하며 로비와 세실리아의 일을 재구성한 자전적 소설을 쓴다. 13세의 브라이오니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은 이후 <작은 아씨들>에서 당찬 조 마치 역을 맡아 훌륭하게 연기하기도 했다.
세실리아 탈리스(키이라 나이틀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브라이오니의 언니. 로비를 사랑하지만 강간범으로 몰린 로비를 끝까지 변호하다 가족과 의절한다. 이후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 로비를 만나 사랑을 이어간다.
로비 터너(제임스 맥어보이)
탈리스 가문의 가정부의 아들이지만 똑똑하여 의대를 지망한다. 어린 시절부터 세실리아와 소꿉친구로 자랐고 브라이오니가 남몰래 짝사랑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후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다 2차 대전에 참전한다. 전장에서도 세실리아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제부터 영화의 결말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13세, 로비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위증이다. 이로 인해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18세, 간호사로 일하면서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사과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만나지도 못했고 영화의 내용은 허구이지만 세실리아의 가족에게 털어놓으며 최소한의 명예라도 회복시켜줄 수 있었다. 용기가 없다는 이유로 진실을 침묵하는 것 또한 의도적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77세가 되어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게 되니 마지막으로 속죄하는 셈 치고 로비와 세실리아가 다시 만나는 내용으로 허구의 소설을 써낸다. 그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선사함으로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하며 소설의 독자, 영화의 관객 모두의 뒤통수를 친 셈이다.
그리고 진실은 가혹하다. 로비는 1940년 6월 1일 덩케르크 철수 작전 마지막 날 패혈증으로 숨졌다. 하루만 더 버텼으면 고국 땅에서 치료받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같은 해 10월 15일 지하철 역에 떨어진 폭격이 수도관을 파괴해 익사하고 말았다.
많은 관객들이 브라이오니를 희대의 발암 캐릭터라고 욕하지만 나는 그녀의 심경이 이해된다. 자신의 거짓말 하나가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왔지만,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고 바로잡기보다 소설 속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을 왜곡한다. 거짓말과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함으로 허구의 이야기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오히려 '속죄'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인터뷰에서 그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나약한 브라이오니가 가진 최후의 용기였을 것이다. 치매에 걸려 자신이 잘 못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 전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겼으니...... 소설 속 반쪽짜리 속죄는 브라이오니가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영화에서도 검은 배경에 고해성사를 하듯 연출한 부분이 좋았다.
그녀의 고백을 듣고 있으면 단 한 줄이 생각난다.
나약한 인간은 악惡이 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