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사랑, <비커밍 제인>
<어톤먼트>에서 브라이오니가 소설로 속죄하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상의 이야기로 대체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소설’의 목적이 아닐까?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통쾌한 액션 활극을 보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며 해피엔딩의 로맨스 소설을 읽고, 보잘것없는 나의 인생에서 벗어나려 누군가의 성공신화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소비하는 대중들은 대단히 영웅적이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사랑에 대한 온갖 지어낸 이야기가 판을 친다. 아무도 그 실체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어떤 이야기라도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에 대한 가사들과 비현실적인 로맨스만 가득한 드라마를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얻을수록 현실은 점점 불만족스러워진다. 그러니 TV, 소설, 영화, 메타버스, 온라인 등 아무리 가상의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어도 마지막엔 현실을 자각하고 자괴감만 밀려올 것이다. 그런 순간에는 직접 내 몸에 붙은 팔다리를 움직여 사랑을 찾아 나서고 원하는 이상을 현실에서 이뤄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냉혹한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있다. 간절히 원했으나 끝끝내 이뤄지지 못한 것들을 허구의 세상에서라도 아름답게 지어내는 것을 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을 때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다면 소설은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자기의 소설 속 인물들로 대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2.16~1817.7.18)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전기 영화라기보다는 제인 오스틴이 사랑했던 톰 러프로 이와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이다. 1796년 제인 오스틴이 21살에 아일랜드 출신의 톰 리프로이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영화에서는 가난한 집안에서 똑똑한 톰이 변호사 공부를 하며 삼촌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제인 오스틴과 헤어진 후 톰 리프로이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일랜드 대법관이 되었다. 자신의 딸을 '제인'이라고 이름 지었고 훗날 조카에게 제인을 순수하게 사랑했노라고 고백했다. 영화에서는 나이가 들고 우연히 제인과 톰이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톰 러프로이가 아일랜드로 돌아간 후에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톰 러프로이와의 결혼이 무산되고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던 중, 제인 오스틴은 습작 「첫인상」을 집필하게 되고 이후 1813년에『오만과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다. 제인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가족들과 의지해서 살았다. 출간한 소설들도 대부분 익명으로 공개했고 1817년 42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그녀의 언니 카산드라도 결혼하지 않았다. 카산드라의 약혼자가 이국 땅에서 황열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둘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고 제인 오스틴은 언니 카산드라의 무릎을 베고 사망했다.
둘 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결핍이 있었기 때문일까? 『오만과 편견』에서 자신의 언니를 투영한 캐릭터 제인 베넷은 찰스 빙리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진심으로 제인을 사랑하는 남자 캐릭터였다. 마찬가지로 제인 오스틴을 투영한 엘리자베스 베넷은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결혼한다. 부유하지만 오만한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던 여자가 오해를 풀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이후 로맨스 장르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누군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기승전-결혼으로 끝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작가의 삶에서는 결혼이 없었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갈망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채우지 못한 결핍을 상상력으로 메꾸면서 완성해낸 소설은 당대 사람들의 결피 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환상적인 로맨스가 되었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인해 전통적인 계층이 불안정한 사회였다. 그런 시대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사랑으로 돈과 계급을 뛰어넘는 환상과 해방감을 주었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로 통해서 당대의 보편적인 정서와 작가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조건만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선택하는 샬럿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결혼 풍토를 보여준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으로 경제적인 안정과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엘리자베스는 모든 여성들이 가지는 환상을 대리 만족시켜준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를 똑똑하고 시대의 기준에 순응하지 않으며, 사람의 심리에 대한 냉철한 관찰력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굉장히 현대적인 여성처럼 그리고 있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엘리자베스의 거절이 얼마나 현대적이며, 그 시대에서 파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남녀 간의 연애놀이가 아닌 시대, 심리, 사랑의 목적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주기 때문에 2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사랑이야기가 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사람과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한 줄은 이렇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