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만나다"

사회복지사 순둥 순둥이님의 연애와 사랑

by 구름조각

남자는 첫사랑을 쉽게 잊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 첫사랑의 깊이나 성숙함과는 관계없이, 그저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흔적을 남긴다. 마치 알에서 깨고 나온 새가 처음 보는 대상을 '어미'라고 인식하는 각인 효과처럼 사랑은 우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뜨는 통로가 된다. 그건 지루하고 경직된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너의 세계'를 경험하고 마침내 '우리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처음으로 진행한 [당신의 Love Story] 방송이 끝나고 며칠 뒤, 잠들기 전 소소한 일상 이야기라도 나눌 생각으로 방을 열었다. 친분이 생긴 유저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내 방에 찾아와 [당신의 Love Story]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늘 게스트를 섭외만 하다가 적극적으로 출연을 하고 싶다는 게스트를 만나니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그는 카카오 음에서 나와 함께 2기 크리에이터로 선정된 '순둥 순둥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이었고 직업은 사회 복지사였다.


평소에 사회복지에 관련된 콘텐츠를 운영하는 분이 어쩐 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니 '이웃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닐까 싶어 고민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명확하게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했다. 살면서 단 한번 사랑한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고 이제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를 찾은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첫사랑은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여자 아이였다고 한다. 소녀와는 같은 반 짝꿍이었지만 처음에는 자주 투닥대는 사이였다고 한다. 자주 말썽을 피우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소년과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똑 부러진 소녀는 쉽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책상에 줄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는 둥 유치한 말다툼으로 언성을 높이면서 서로를 싫어했다고 했다. 마음이 덜 자란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그런 투박한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날 체육 시간이었다. 소녀는 몸이 아파서 교실에 남아 있었고 공교롭게도 소년은 그날 주번이라 교실 정리를 하러 남았다. 익숙한 공간에 둘 만 남겨지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보는 눈 없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서로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한마디 두 마디가 이어지고 어느새 체육시간이 끝나고 반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소년은 그날, 늘 자신감 넘치게만 보였던 소녀의 여린 속마음을 조금 들여다보았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하고부터 마음이 초조해졌다. 곧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막상 고백을 하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결국 소년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 이메일로 보냈다. 그저 솔직하게 썼을 뿐인데 A4용지 2장 분량이 훌쩍 넘었다. 이제는 다 자라 13년 전의 첫사랑을 회상하는 그는 소녀에게 썼던 이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하는데 너도 내가 마음에 들면 밤 8시에 어린이 공원에서 기다릴게…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을 테니 겨울이었을 것이고 그 시기에 저녁 8시라면 제법 춥고 어두웠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호수 공원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16살 남자아이를 상상해 봤다. 키만 멀쑥하게 커서는 얼굴이 발그랗게 상기되어 있었을 소년을 생각하니 퍽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8시 30분이 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소년은 마음을 접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멀리서 실루엣이 보였고 수줍은 표정을 한 소녀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얼떨떨한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년은 "눈을 감아봐"라고 말한 뒤 무릎을 꿇고 노래를 불러줬다고 했다. 포지션의 <I love You>라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고 소년은 준비해 온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난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다가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는데, 그의 고백이 그간 로맨스 영화에서 본 듯한 고백 장면을 다 합쳐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지에 노래에 꽃다발까지...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던 소년은 16년간 살면서 본 가장 로맨틱한 것들만 소녀에게 선물해주었다. 아마 노래를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을 것이고 소녀의 심장도 쿵쾅거려 노래를 하는 이도 노래를 듣는 이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서투름이 더욱 사랑스러운 고백을 완성했다.


둘은 같은 재단의 남고, 여고로 진학했는데 두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덕분에 수업은 따로 들었지만 매일 같이 하교했고 소년은 늘 소녀를 집에 데려다줬다고 했다. 학생답고 예쁜 사랑을 키워 나갔다. 어린 학생이라고 해도 3년이란 시간 동안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릴수록 경솔하고 충동적이라 그 시절 내 친구들은 2주 만에도 헤어지고 금방 다른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어쩌면 10대 시절의 3년은 성인들의 시간으로 따지만 6년, 9년에 버금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와 수능이 끝날 때까지 사귀었다고 했으니 사람의 감수성이 가장 여린 사춘기를 한 명의 여자 친구와 보낸 셈이다. 아무도 딛지 않은 하얀 눈 위에 누군가의 발자국을 남기듯 하얗고 예쁜 소년의 마음에는 첫 여자 친구와의 추억이 가득할 것이다.


어떻게 헤어졌냐고 물어보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첫사랑은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라 감히 꺼내기도 조심스러운 유리그릇 같았다. 이별 장면을 회상하던 그는 말을 아꼈다.

"그 친구의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에 헤어졌는데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사랑하고 있었고 곧 대학교를 가면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만 했다.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원인이기도 했고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소녀였을 것이다. 복잡한 가정사 탓에 소녀의 감정 기복도 심해졌고 수능이 끝나고서는 갑자기 연락이 뜸해졌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짧은 이별통보가 메일로 왔다. 사랑의 시작도 끝도 이메일 한통으로 정리되었다.


풋풋한 첫사랑이자 조금은 아쉬운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것이 유일했다. 그 후로 대학에서도 그에게 대시하거나 잘 될 뻔했던 여자들은 몇몇 있었지만 늘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가 상대의 호감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시간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 대학에 들어간 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본 순간 왠지 헤어진 여자 친구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도 모른 척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로 헤어진 거라면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상황만 달라지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난 그가 왜 '전 여자 친구일지도 모를 번호를 계속 외면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미운 마음이 남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그 애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헤어진 첫사랑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 물어봤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짧은 세 문장을 말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내 생각도 많이 했어?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는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어쩌면 너무 사랑했던 첫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두려워서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애써 붙들어놓은 마음의 평안이 무너질까 봐, 마음 깊이 묻어둔 슬픔이 터져 나올까 봐...


어떤 사랑이야기는 성장 스토리로, 어떤 사랑이야기는 가슴 아픈 상처로 기록된다. 오늘 사랑이야기는 아련한 수채화 같은 사랑이었다. 서랍 속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교복을 입은 소년과 소녀를 보았다. 오렌지 색 날짜가 적힌 옛날 사진에는 순수한 첫사랑이 남아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유리병 속 편지처럼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떠돌다가 우연히 그의 첫사랑에게 닿게 된다면 좋겠다. 그렇게 기적처럼 그때는 차마 전할 수 없던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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