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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Feb 10. 2022

베이커리 빌런 등급

빵집에서 만난 진상 썰 모음집

    20대 초반 가장 처음 경험한 아르바이트는 대형마트 안에 있는 베이커리의 직원이었다. 무려 최저시급이 4580원이던 시절, 사회초년생이 빵집에서 만난 진상들에 대해 소개해보려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대적하는 악당들을 빌런(villain)이라고 부르는데 앞으로 소개할 진상들은 가히 악당이라 불릴 만하다.


Lv.1 세상에 나 혼자 사는 유형

    겉보기에는 평범한 손님이었다. 왼손은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은 집게로 빵을 쟁반 위에 옮겨 담고 있었다. 문제는 손님의 쟁반이 다른 빵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판매용 빵 위에 태연히 쟁반을 올려놓고 거기에 자기가 먹을 빵을 담고 있는 손님을 보는 순간 말 문이 턱 하고 막힐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알바 첫날부터 남들이 먹을 빵 위에 쟁반을 올리면 안 된다는 말을 성인 여자에게 해야 할 상황이 올지 몰랐다. 


Lv.2 막무가내로 떼쓰는 유형

    영수증 3장을 모아 오면 식빵 1개로 교환해주는 행사를 하던 때였다. 한 할머니께서 영수증 2장을 가지고 오시더니 식빵 2개를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영수증 하단에 행사 안내 문구를 읽어주며 "여기에 적힌 대로 영수증 3장에 식빵 1개를 교환해드리는 거예요."라고 설명해드렸다. 그러자 내 손을 매섭게 내려치며 "할머니라 눈이 안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읽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 점장이 나와서 식빵 1개 주면서 달래서 보냈던 것 같다. 억울한 마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터에서 울었던 날로 기억한다. 


Lv.3 걸신들린 유형

    일하던 매장에는 시식코너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치즈빵을 잘게 잘라서 시식도 권유하고 바로 판매할 수 있도록 포장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한 아저씨가 오더니 치즈빵이 너무 맛있다며 칭찬을 하고 금방 나온 빵이 있으면 그걸로 포장해달라는 말도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절한 손님에게 따끈한 치즈빵을 주고 싶어서 매장 뒤쪽 키친에 들어간 사이, 그 손님은 시식용 빵을 다 집어 먹고는 판매용 빵까지 몇 점 집어먹고 사라졌다. 겨우 빵 몇 조각에 치졸한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인간에 대한 환멸감이 느껴졌던 순간이다. 


Lv.4 "네 주제에?" 유형

    무슨 일을 하던 만나는 손님들 중에 꼭 한 명씩은 직업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유형들이 있다. 젊은 남자 손님 하나도 그런 유형이었는데 나름 단골이라 얼굴도 기억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날은 대선 투표날이었고 그 남자 손님은 일찍 손님이 끊겨 한산한 베이커리에 와서 한가득 빵을 고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세요! 오늘 투표날인데 투표는 하셨어요?"라고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손님은 환하게 웃으며 "빵집 알바가 무슨 투표 타령이에요?"라는 답을 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기분 나쁘던지 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감추는 게 힘들었다. 빵집 알바가 불가촉천민도 아니고 '투표 타령'이라며 무시하는 그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했는데 앞으로 손님한테 쓸데없는 거 묻지 말라고 해서 그 뒤로는 손님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만 하고 안부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Lv.5 '직원은 노예처럼' 유형

    일하던 마트는 졸부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었다. 그 말은 품격은 없고 돈만 많아 같잖은 우월감을 가진 인간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날 등장한 부부도 일하던 나에게 대뜸 반말로 "이거 하나 담아봐"라며 턱짓으로 커피번 하나를 가리켰다. 불쑥 짜증이 올라왔지만 침착하게 "손님 빵은 쟁반에 집게로 담으시면 돼요."라고 안내했지만 바쁘다며 내가 직접 빵을 담아달라고 강요했다. 한숨을 삭이며 봉지에 빵을 담고는 "안쪽 카운터에서 계산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천 원짜리 2장을 끼워 건네주더니 "가서 계산하고 와"라는 것이다. 그날이 마침 알바 마지막 날이어서 손에 든 빵을 집어던지고 욕이라도 시원하게 퍼부을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그 순간을 잘 넘긴 건 순전히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Lv.6 좀도둑 유형

    중학생들이 와서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잠시 후에 환불해달라며 케이크를 도로 가지고 왔다. 그때 다른 손님을 응대하는 중이어서 케이크 상자를 열지 않고 상자 위쪽의 투명한 비닐로 보이는 것만 언뜻 확인하고 환불해줬다. 나중에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중학생들이 케이크 윗면은 그대로 두고 속을 다 파먹은 후에 가지고 온 것이다. 쥐가 파먹은 듯한 케이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선배에게 사과하고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하니 선배도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쥐새끼처럼 케이크만 파먹고 환불해갔던 치졸하고 구질구질했던 사건이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Lv.7 내 말이 곧 법인 유형

    지금까지 이야기한 빌런들 중 그 누구도 레벨 7을 이길 수 없다. 그때는 1월 중순이었는데 한 손님이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대한 '변상'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그냥 환불이나 교환도 아니고 '변상'이라기에 "케이크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라고 물으니 "케이크가 맛이 없어서 내 크리스마스를 망친 것에 대한 변상을 받으러 왔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 사람은 내가 상대할 레벨이 아니구나'를 깨닫고 곧장 점장님을 불렀는데 점장님도 사정을 듣자마자 머리에 총 맞은 듯한 표정으로 당황해했다. 


손님 : 아니 무슨 케이크에 빵은 없고 크림만 많아요?

점장 : 손님 사가신 케이크가 초콜릿 무스 케이크인데 원래 케이크 시트 위에 크림이 많은 케이크입니다.

손님 : 그럼 제가 샀을 때 설명해줬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분명 영수증을 지참하고 10일 내에 환불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걸 설명했음에도 막무가내로 변상을 하라기에 결국 점장님이 포기하고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라고 물었다. 당시에 손님이 사갔던 케이크는 16000원이었데 18000짜리 호두파이를 가져가겠다고... 이때쯤 내가 속으로 쌍욕을 한번 했던 것 같다. 결국 빵을 16000원 치 받아가는 걸로 마무리되었는데 점장님도 억울하셨던 모양인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셨다.


점장 : 근데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많이 팔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너무 당혹스럽네요. 다른 손님들은 이렇게 환불하러 오신 분이 없거든요?

손님 : 다른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안 왔겠죠. 저는 부지런하니까 왔고! 


    끝까지 당당했던 그 한마디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회생활에서 '부당한 일'을 많이 경험한다지만 그렇게나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오히려 남들보다 부지런하다는 우월감을 자랑하는 빌런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사건을 보고 완전히 질려서 베이커리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었다. 그 후로 여러 일을 하면서도 저 정도로 '말이 안 통했던'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요즘 다시 바리스타로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면서 10년 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했던 때가 떠올라서 글로 정리해봤다. 진상 손님이라는 말로도 부족해서 빌런이라 붙이고 싶은 이유는 남들을 속이고, 무시하고,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다. 누군가는 당신의 행위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의 무례한 행위가 남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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