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대상화와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
독일에서 살았던 공동 주택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토고에서 온 여자들이 있었다. 집주인은 40대의 터키인으로 장성한 아들이 두 명 있고 가까운 곳에 아내와 살고 있었다. 그 터키인은 작은 바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에서 온 친구가 주중에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이 그만두게 되자 집주인은 나에게 일주일 중 2일만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때는 독일어 실력이 부족해서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운영하는 바는 아주 작고 낡은 곳이어서 단골손님 몇몇 외에는 늘 조용했다. 하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팁이라도 받으면 내 몫이었기 때문에 꽤 쏠쏠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정말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말도 없이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다 터키인 사장은 나에게 술을 한잔 권했다. 바텐더로 일하려면 주종도 알아야 한다며 데낄라나 보드카, 코냑 같은 술을 주면서 맛을 보라고 했다. 이것도 배워야 한다기에 술을 맛보며 열심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꽤나 취해서 혼자 몸을 가누기 힘든 정도가 되었다. 그런 상태였음에도 그가 나에게 키스를 하며 "안쪽에 침대가 있으니 들어가자"라고 잡아끌었을 때는 뒷덜미가 빳빳하게 서는 것 같았다. '살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그때만큼 강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화장실을 간다며 뿌리치고 나와서 지금이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그에게 집에 가겠다며 말했고 취한 줄 알았던 애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그는 얌전히 집에 보내줬다. 만약에 그가 끝까지 완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는 내가 일했던 바의 사장이었던 동시에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언제 내 방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금세 공포에 짓눌려 방에 고립되어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모르는 남자가 말이라도 걸면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집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숨어든 내 방도 전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 악몽을 꾸고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으며 현실감각이 사라졌다. 몸과 영혼이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느꼈다. 토악질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고통들에게 허우적대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해서 떠난 독일 유학을 1년도 못 버티고 돌아왔다.
한국에서 심리상담을 받았을 때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여자인 게 싫다. 왜냐하면 여자의 몸은 나약해서 남자들에게 너무 쉽게 위협을 받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에서도 늘 약자이고, 낯선 남자들도 날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성욕을 해소할 대상으로 본다." 내가 느끼는 모든 고통은 내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성성은 나에게 저주나 속박이었다. 내 영혼은 자유로운데 여성의 육체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고 죽으면 모든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여섯 차례의 심리상담이 끝날 즈음 선생님이 "이제 연애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나의 여성성을 받아들이고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연애는 결코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했다.
두 번째 남자 친구와의 첫 섹스도 콘돔 없이 했다. 그에게 맞는 콘돔 사이즈가 없다는 게 이유였는데 내가 라지 사이즈를 구해와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콘돔을 싫어하느냐는 말에 "콘돔을 끼고 섹스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씹다가 삼키지 않고 뱉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했다. 순식간에 나 몸이 먹을 것으로 비유당해 어벙벙해졌다. '오빠가 다른 여자와 원나잇이라도 하고 와서 나에게 성병을 옮길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만 그런 의심을 하는 거다."라고 받아쳤다. 합리적인 의심마저 내 탓으로 돌리는 기묘한 가스라이팅이었다.
"오빠 못 믿어?"
"응. 못 믿어. 네가 오늘은 날 사랑한다 말하지만 뱃속의 아이도 사랑할지는 모르겠어."
"오빠가 아는데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게 아니야."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임신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리고 임신한 여자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임신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지 몰라."
"오빠가 책임질게."
"넌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어. 애초에 여자가 임신하게 되면 남자가 책임지는 것이, 그의 아내와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되도록 궁지에 몰아가는 거야. 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통제할 거야."
콘돔을 쓰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는 말에 콘돔과 사랑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일장연설을 들었어야 했다. 길고 긴 싸움 끝에 내가 먼저 지쳤다.
결국에는 산부인과에 가서 피임약을 처방받기로 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피임약은 늘 몸에 부정출혈이나 메스꺼움 등의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방되는 피임약을 먹고 나서는 부작용으로 우울감이 느껴졌다. 안전하게 섹스하려고 피임약을 먹었는데, 피임약을 먹으니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약 자체의 부작용도 있겠지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관계를 뿌리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는 약사가 되기 위해 약대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했고 그가 날 이해해 주길 바랐다. 금세 기대는 실망으로, 사랑은 원망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은 남자 친구가 왜 예전처럼 느끼지 못하냐고 물었다. 반응이 덜한 것 같다는 말에 몸이 좋지 않다고 얼버무렸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에게 존중받지 못했고 내 몸의 쾌락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돈도 받지 않는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피임의 부담은 나 혼자 지면서 나의 쾌락보다 그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해줘야 하는 저렴한 여자. 그 모욕적인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얼마 후 두 번째 연애도 끝이 났다.
연애가 끝난 후 약국에서 일을 했다. 몸은 힘들고 급여는 적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것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약국 국장의 부인은 60세가 넘었는데 어느 날은 손님과 "우리 나이가 되면 남자가 필요 없어진다."는 말을 했다. 비슷한 또래의 손님과 갱년기가 오면 남편이 귀찮아진다고 농담을 하면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서 빨리 시간이 내 몸의 여성성을 다 시들게 만들어서 '남자가 필요 없는 몸이 되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차라리 여자를 좋아했으면 좀 나았을까?
술에 취해 정신없이 뱉어내는 푸념에도 친구는 함께 웃어주며 말했다.
"넌 지금도 사는 게 힘든데 레즈비언까지 되었으면 사는 게 너무 힘들었을 거야."
친구가 채워주는 소주잔을 들이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어리석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