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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May 23. 2022

어머니의 그림

허회경 <그렇게 살아가는 것>

    어머니는 요즘 실버타운 브이로그를 본다고 하셨다. 누군가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 영상이 실버타운까지 진출하다니,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덧붙여 어머니는 실버타운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들어간다면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들어가서 여러 가지 문화생활이나 사교활동을 해야 한단다. 


    아침식사를 하다가 덜컥 어머니의 노후 계획을 듣는 것이 낯설었다. 아버지는 늙어서 산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실버타운에 들어가고자 하시니 노년에는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찾으실 모양이다. 아버지는 홀로 지내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고 싶어 하신다. 이렇게 성향 차이가 크니 30여 년의 결혼 생활이 힘들었을 수밖에 없겠다.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본 어머니가 그린 그림을 기억한다. 폭풍이 치는 벌판에 작은 소녀가 그루터기에 앉아 정면을 보고 있는 그림 한점. 또 하나는 원형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그림 한점. 가족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추상화는 묘하게 슬픈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그림들을 그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외롭고 따뜻한 가족의 정을 그리워했던 걸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사를 하면서 그림이 없어졌다. 


    미대를 졸업한 후에 어머니는 잠깐 미술학원을 운영하셨다. 내 기억에는 동화책 삽화를 그리는 일도 잠깐 하셨던 것 같다. 그 후론 꽤 오랜 시간 미술과는 관계없는 직업을 구하셨다. 한 번은 어머니께 물은 적이 있다. 어째서 전공과는 다른 일을 하느냐고. 아직 솜씨가 녹슬지 않았고, 여전히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서, 왜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느냐고 말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좋아하는 일로 돈 벌기 싫어서......

    어렸을 땐 그 대답이 아리송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좋아하는 일에 먹고사는 치욕이 더해지면 더 이상 온전히 좋아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지키려면 생계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마치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끝내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 같을까? 


    67년 생. 올해로 어머니는 쉰여섯 살. 이제는 누군가의 어머니나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딸이 되기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하신다. 최근에는 다시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하셨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셨지만 오랫동안 그림을 놓고 지낸 탓에 손이 굳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다시 돌아간 곳이 그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것은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다가 마지막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고 아내로서의 역할도 다하고 이제는 자기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고 한다. 24살에 내려놓았던 꿈으로 돌아가려 하신다. 


    허회경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의 가사는 삶이 이렇다고 말한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듯 남을 위로하기도 하고, '사랑' 비슷한 것을 한다고 말이다. 어느 날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도 하고 어느 날은 태어나길 잘했다고 위안하지만 대체로는 '그저 그런 날들'이다.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사랑도 쉽게 시들어 버려서 모든 게 서럽기도 하다. 나라는 사람도 이렇게 쉽게 잊힐까 봐 두렵기도 하다. 다 살고도 사는 게 뭔지 모를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가사가 묘하게 위안을 준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가 보다...라고 느긋한 마음을 먹게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미래 계획도 나에게 그런 위안을 준다.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어머니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1Qtr8TznwNI

<그렇게 살아가는 것> -허회경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날씨 같은 인생을 탓하고
또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

사랑 같은 말은 내뱉고
작은 일에 웃음 지어놓고선
또 상처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것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 게
가끔은 너무 서러워 나
익숙한 듯이 살아가는 게
가끔은 너무 무서워 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정답을 찾아 헤매다가
그렇게 눈을 감는 것

그렇게 잠에 드는 것
그렇게 잠에 드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아아 아 아아아 아

상처 같은 말을 내뱉고
예쁜 말을 찾아 헤매고선
한숨 같은 것을 깊게 내뱉는 것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서
다 괜찮다고 되뇌다가
그렇게 잠에 드는 것

그렇게 꿈을 꾸는 것
그렇게 꿈을 꾸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우우우 우 우우우 우

한숨 같은 것을 내뱉고
사람들은 찾아 꼭 안고선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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