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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l 28. 2022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에게

브런치 작가에게 보내는 글

    한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었다. 그의 글은 벼려진 칼날을 목적 없이 휘적휘적 휘두르는 것 같았다. 잘 쓴 글이었다. 단어는 풍부했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좋았다. 나도 이런 문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글이 혼자만의 넋두리인 듯 자기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읽는 사람에게 와닿지 않았다. 글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향한 눈먼 분노. 아무리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어도 눈먼 자의 손에서 방향 없이 휘두른다면 무는커녕 종이 한 장도 베지 못할 것이다. 괜히 애꿎은 사람만 다치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댓글을 하나 남기려다가 말았다. 그는 일종의 자기 치유 과정에 있다. 자기 안에 있는 독을 토해내어 글자로 남기고 천천히 곱씹어 다시 삼키는 작업이다. 작업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의 안에서 썩은 것들을 충분히 게워 올려야 속이 편안해진다. 겉으로 보이는 삶으로는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작은 상처도 오래 품고 있다가 곪아버린다. 어떤 사람은 깊은 상처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전자는 나약하고 후자는 강해서가 아니다. 어떤 이는 고통에 대한 내성을 타고난다. 아무렇지 않게 버티다 어느 날 픽 고꾸라져 죽어버리기도 한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처럼 아프다고 울면서 절뚝거리던 사람이 결승선에 다다르기도 한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 


    가끔 내 글을 토사물에 비유하곤 한다.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차올라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써내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인터넷 카페에서 글을 써서 연재했을 때 그랬다. 우울증을 겪고 있던 때라 마음이 늘 아팠다.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친구들도, 가족들도 나를 버거워했다. 누군가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봐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고통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심리상담가뿐이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궁핍했다. 이야기할 곳이 없다고 벽에다 주절 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미쳐 가는구나...' 했다. 그래서 글을 썼다. 누가 읽건 말건 상관없이 글을 썼다. 한번 글을 쓰면 3000자, 4000자도 훌쩍 넘어갔다. 내가 쓴 글이지만 다시 읽으라면 못 읽는다. 답답하고 우울한 글에서 감정이 전염된다. 다시 아프고 다시 외로워진다. 


    카페에 글을 쓰다가 어느 날 댓글이 달렸다. '누가 읽고 있구나.' 그 순간부터 외로움이 사라졌다. 응답은 고립된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그 후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글을 쓴다.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서 그렇다. 그때쯤에는 슬픔도 고통도 많이 게워내서 속이 편해졌다. 기꺼이 누군가를 위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싶다거나, 등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쓰는 행위'에 무언가 분명한 목적이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정말도 단 한치의 어려움도 없이 마냥 즐거운 일인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들은 늘 머릿속에서 퐁퐁 샘솟지만 그것들이 단어와 단어로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마침내 기승전결을 갖춘 글이 되기까지는 더 시간이 걸린다. 한 편의 글이 나오기까지는 꾸역꾸역 삶을 밀어 넣는다. 읽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먹는 것 등의 오감으로 삶의 단상을 수집한다. 머리가 터질 때쯤이 되어야 한 편이 나온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그렇다.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소설 해리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의 호크룩스가 떠올랐다. 사악한 마법사 볼드모트는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으로 자신의 영혼을 쪼개어 여러 보물들에 숨겨놓는다. 영혼을 쪼개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뱀, 왕관, 목걸이 등에 숨긴 조각난 영혼들 덕분에 볼드모트는 질긴 목숨을 유지하며 해리포터 7편까지 최종 빌런이 되었다. 


    글이라는 것이 작가의 호크룩스라고 생각한다. 매번 작가의 영혼을 조각내어 글에 숨겨놓는다. 모든 글이 자아의 일부분이다. 그렇게 몇백 편으로 조각낸 영혼은 인터넷이라는 바닷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나는 죽어도 내 글은 남을 것이다. 이런 집착은 '내가 평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에서 시작된 것이다.


    언제 썼는지도 기억 안나는 글이 조회수 8000을 넘었다고 알림이 온다. 글은 아직 살아있고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동안 누적 조회수가 훌쩍 오른 것을 봤다. 내 영혼이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감정을 주는 일을 찾은 것이 행운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한 브런치 작가는 자기 고통을 글로 쓰고 있다. 그런 글에는 감히 댓글을 남기기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그가 계속 글을 쓰면 좋겠다. 게워내고 또 게워내고. 마침내 조금 속이 편안해지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말이 들릴 것이다. 그는 나보다 글재주가 좋고 많은 경험을 했으니, 그때쯤엔 나는 꿈도 못 꿀 멋진 글을 써내고 말 것이다. 그동안 나는 정진해야 겠지. 좋은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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