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나의 불멸의 연인이여...

내 우울의 뿌리를 찾아서

by 구름조각

엄마는 내가 명랑하고 씩씩한 어린이였다고 회상한다. 기억하기로 내가 젖먹이일 때, 잠든 나를 두고 장을 보러 나갔는데 생각보다 늦어져 헐레벌떡 들어왔더니 내가 이미 깨서 혼자 젖병을 빨고 있더라는 것이다. 엄마는 울지도 않고 혼자 젖병까지 찾아 먹은 나를 기특하게 여겼지만, 요즘에는 그걸 회피형 애착이라고 설명한다. 양육자와의 애착이 잘 형성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고, 엄마를 다시 보면 울음을 그치는 게 정상이다.


모든 일을 과거의 사건과 부모와의 애착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큰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의 가정환경이 내가 가진 특정한 기질을 극대화하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한다. 나에게 억압된 부분은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해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머니도 내 감정을 다 받아주지 못했다. 내가 유독 감정표현이 극적이고 기복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도 날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인지 여기저기 상담도 많이 다녔다. 초등학생 때 심리검사를 했는데 독립성은 매우 높게, 정서 안정 부분은 점수가 매우 낮게 나왔었다. 지수가 의미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낮아서 얼른 독립하고 싶다는 것어머니에게서 받는 정서적 안정이나 지지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좀 잘 대처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 후로도 나는 내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대체로 심각하고 고민이 많다 보니 어른들 눈에는 성숙해서 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학교 선생님들은 내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다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도 같은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게 어색하고 힘들었다. 여자아이들끼리 같이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편했고,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 같은 것에 끼여 있는 것도 영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벅차서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걸 힘들어했다. 그래서 점점 혼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학교를 가면 첫 학기 동안은 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살다가 여름방학이 지나면 조금 익숙해져서 친구들이랑 대화를 했지만, 1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반 친구들과 친해지는 게 큰 문제였다. 매년 5월까지는 적응을 못해서 울기도 했었다.


결정적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반 친구들과 싸우다가 여러 남자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던 일이다. 그날은 비가 왔고, 장소는 동네 놀이터였고, 꽤 많은 남자애들이 날 둘러싸고 있었고, 여자애들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날이 처형장 같은 분위기였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돌을 던지는 것처럼, 욕설과 폭행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처벌하는 것 같은 느낌. 그날 이후로 비가 오는 날에는 이유도 없이 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다.


온몸에 흙이 묻어 있었고, 머리에 누가 침도 뱉어 놨으니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어려웠다. 집에 가니 때마침 이모가 있었고 내가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는 동안, 문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기 물소리에 이모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 엄마가 조심스레 내 방에 들어와서 혹시 친구들이랑 싸웠냐고 물어보셨다. 딸애가 밖에서 맞고 들어왔다는데 속상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엄마는 날 위해 뭐든지 해주고 싶어 했지만 정작 나는 이 일을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왜 그랬을까. 난 그때 일이 수치스러움으로 남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론화시켜서 그 아이들을 처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근데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엄마는 내 뜻을 존중해 주었지만, 다음날 학교에서 애들이 와서 사과를 하고 선생님도 날 좀 더 신경 써 주셨던 걸 보면 엄마도 나름의 조치를 취하셨을 거라 생각한다.


후에 나를 상담해준 선생님은 내가 소아 우울증이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우울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그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지금 와서야 크게 터진 것뿐이라고 설명하셨다. 뿌리를 찾아봐도 이미 너무 깊어져서 도무지 언제가 정확한 원인인지 모를 만큼 예전부터 시작된 우울증이다. 더 파고들면 나의 유전자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조상 대에서 내려오는 카르마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려고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과거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어 문제의 원인을 찾는 건 범죄를 밝혀내는 형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 우울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게 할 수 있나.
나는 어떻게 날 죽이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기억과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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