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네 번째

4. 뭐든 다시 시작하는 건 쉽지 않다.

by 구름조각

동생들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것 같았다. 6남매 중 제일 언니가 이런 소란한 연애를 하다니. L의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와서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호통을 쳤다. 이크, 아버지가 아시면 큰 일 날 것 같은데. 때마침 P와 친구도 비틀거리며 집에 가는 것 같았다. 지금 가면 막차는 잡아 탈 수 있을 시간이다. L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래도 날 좀 좋아하긴 했나 봐?'


그날 하루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이어졌다. P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L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어느 날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참다못한 동네 주민의 신고로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작은 동네는 금방 소문이 퍼져, 이젠 L이 학교에 갈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어제 걔 남자 친구니?
아유, 조막만 하던 게 언제 이렇게 커서 남자도 만나고. 고놈이 생긴 건 멀쩡하던데?
그래도 술주정하는 놈은 만나지 마라!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어
얼씨구, 청춘이네...
왜 시집 한번 더 가고 싶어?
지금 서방만 아니면 누구라도 좋지!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러운 건 L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밤에 절에 가서 기도를 하느라 딸의 남자 친구가 술 취해서 온 건 못 봤지만 낮에 동네 사람들이 친히 알려줬다. "그 집 첫째 딸 연애하는 모양이던데?"

이 눔의 가시내가 공부한다고 박박 우겨서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동네 창피하게 연애질이나 하고 다녀!

L의 머리가 깎일 뻔 한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었다. 옛날부터 느끼는 거지만 우리 외할아버지는 묘하게 쿨한 구석이 있으시다.


P는 술병이 나서 드러누워 있었다. 머리가 지끈 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이별의 아픔인지 숙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연탄가스를 마셨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시장 뒷골목의 낡은 집에 연탄가스가 샜을 때도 P가 제일 먼저 알아채고 기어 나와 가족들을 깨웠다. 원래 3남매 사이 가운데 낀 둘째가 제일 생존력이 강한 법이다.


매일 새벽 일찍 나가는 P의 어머니도 뭔가 눈치챌 법했다. 술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걸 좋아하는 놈이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연짱 술 먹고 드러누운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가방도 어디서 잃어버리고 지갑도 없어졌다는 모양이다. P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큰 아들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말만 들었다.


장사를 하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남편이 죽고 혼자 3남매를 키우려면 원더우먼이 되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원더우먼은 잘록한 허리로 힘이나 쓸 줄 알지, 우리 할머니는 자식도 낳고 남편 없이 먹성 좋은 두 아들과 막내딸을 키워 시집 장가도 보냈으니 할머니가 더 대단하신 분이다.


신선한 채소를 진열하고 일일이 가격을 기억하고, 틈틈이 팔기 좋게 채소를 다듬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간다. 그렇게 분주히 일하는 중에도 마음 한편에 둘째 아들이 영 신경 쓰였다. 엄마의 촉은 귀신도 못 속인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P의 친구가 가게로 찾아왔다.

오, 그래. 우짠 일이고?
어제 P랑 술마셨는데 걔가 가방을 놓고 가서요. 제가 가게 다시 들러서 챙겨왔어요.
아유 고맙네. 근데 그놈아가 무슨 일이고? 와 그래 술 처먹고 돌아댕기는데? 니 뭣 좀 아나?
걔 여자친구랑 헤어졌을 걸요?
갸가 여자도 만나나? 뭐하는 아가씬데? 니도 아는 아가?
산악회 후배인데 만난 지 한 달도 안돼서 차였다던데요.
우리 아들이 차였다꼬?
저도 뭐 대충 전해 들어서 자세한 건 몰라요.
만난다는 아가씨 이름은 아나?
L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저는 수업 있어서 이제 가볼게요. 어머니, 가방은 P 오면 전해주세요.
오야. 그래. 조심히 가래이.

장사를 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P의 어머니는 한번 들은 아들의 여자 친구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 놓고 있었다. 떼인 외상값을 기억하고, 곯은 채소를 상자 밑에 숨겨놓은 도매상의 얼굴을 기억하는 짬이다. P가 퉁퉁 부은 얼굴로 친구가 가져다준 가방을 메고 오후 강의에 간 사이에, 집에서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와 뒤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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