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다섯 번째

5.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건 어머니의 사랑이다.

by 구름조각
엄마 뭐해?
어, 공주 왔나?

두 아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딸은 어려서부터 늘 공주라고 불렸다. 우리 공주. 실제로 공주 같은 삶보단 오빠들에게 치이는 삶을 살았지만 말이다. 둘째와는 5살, 첫째와는 8살 차이가 난다. 애들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는 고명딸이라고 많이 예뻐해 줬지만 정작 공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전화번호부는 왜 보고 있어?
그냥 뭣 좀 본다꼬...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면 금세 번호를 알 거라고 생각한 건 심히 오산이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동명이인이 많았다. 안 그래도 곧 명절이라 채소 들여놓을게 많아서 바쁜데 아들놈이 늙은 어미를 신경 쓰이게 한다.


서양 미술학과를 다니는 L은 나름 촉망받는 제자였다. 교수님은 L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유의 스타일을 좋아하셨다. 다채로운 색감과 특유의 비장한 분위기 같은 것. 그 교수님은 L이 재주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보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L의 독특한 스타일은 그림보다 입고 있는 옷에서 더 쉽게 보였다. 흔치 않은 짙은 녹색 원피스와 보라색 레깅스, 크림색 뾰족구두. 옛날 사진에서 나의 엄마는 독특한 옷을 입고 독특한 포즈를 취한 짧은 커트머리의 신여성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백화점에 엘리베이터 걸로 취직한 셋째와 쇼핑을 자주 나갔다. 키가 작은 L과는 달리 셋째는 키가 170에 가까운 늘씬한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L은 키가 작은 아버지를 닮았고, 동생은 키가 큰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백화점에서 일하고 번 돈을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는 것으로 탕진했다. 20대 초반 젊은 여자들의 예쁜 옷을 향한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그날도 월급을 받은 동생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L도 등산사에서 일을 하면서 조금씩이나마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꼭 예쁜 가을 외투를 하나 사려고 마음먹고 나왔다. 하지만 꼭 수중에 돈이 넉넉할 때는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이 보이지 않는다.

다리도 아픈데 커피숖이나 갈까 봐.
커피 말고 그냥 짜장면이나 한 그릇 먹을래?
난 짜장면 느끼해서 싫어, 갈 거면 쫄면이나 먹으러 가.
너 저번에도 쫄면 먹었지 않아? 질리지도 않냐?
난 매콤한 게 좋다고. 나 청양고추 없으면 밥 못 먹는 거 몰라?
아오, 알았어 가자 가.

분식집에는 여러 명의 중,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L과 동생도 중학생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시내 구경 오던 시절부터 다닌 단골집이다. 쫄면 하나, 우동 하나? 응, 같이 나눠 먹자.

그래서 어떡할 건데?
뭘?
그 남자 말이야.
아, 몰라 됐어.
가을에 등산대회 있다며 거기서 어차피 볼 거 아니야?
아 맞네...
뭐야, 까먹고 있었냐? 으이그... 안 만날 거면 확실하게 정리해. 동네에 소문나면 언니만 욕먹는 거 몰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만큼 시원시원한 성격의 셋째는 미적대고 꾸물거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 청양고추 없이 밥 못 먹는 식성만큼이나 화끈한 성격 탓이다. 화끈하고 시원한. 사람이 이렇게 모순적이다. 반면에 L은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하필이면 산악회에 들어간 탓에 가을에 열리는 등산대회에서 꼼짝없이 마주칠 판이다. 중간에 겹치는 지인들도 여럿 있어서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도 영 찜찜하다. 무엇보다도 L은 본인의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겠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찼는데 술 먹고 저렇게 찾아오는 거 보니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는 것이다.

아니 지난번에는 같이 짜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혼자 와구와구 먹는 거야 배가 많이 고팠나 싶어서 내꺼 더 먹을래? 이러니까 갑자기 짜장면을 반 넘게 가져가는 거 있지? 나는 몇 젓가락 집어 먹지도 못했는데 사람이 배려가 없어 배려가 그리고 커피숖에라도 가면 왜 자꾸 커피를 원샷하는 거냐고? 난 앉아서 얘기도 좀 하고 싶은데 커피숖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자꾸 일어나자 그러고 그리고 자꾸 나보고 머리 나쁘다고 하는 것도 짜증 나게 지는 공부 좀 했다고 유세는 나도 나름 열심히 해서 미대 들어간 거거든 지는 뭐 렘브란트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근데 너 내 말 듣고 있니?
아니, 안 듣고 있는데?
아이씨...

결국 아무것도 못 사고 수다만 잔뜩 떨다가 집에 왔다. 쫄면이랑 우동 먹은 건 말하다가 다 소화된 모양인지 금세 배가 출출해졌다.

야, 아까 북문 앞에서 떡볶이 좀 사 올걸.
밤에 먹으면 살쪄. 언니는 키 작아서 살찌면 옆으로 굴러 다닐걸.
이게 언니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때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여보세요? 아 잠시만요. 큰 누나 전화 왔어!


"내 전화라고?" L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어, 그... 거 뭐꼬, 으이... 내는 P 엄마 되는 사람인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P와 L의 사랑,네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