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여섯 번째

6. 사랑에도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온다.

by 구름조각

장사를 마치고 들어온 집에는 어수선하게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다. P는 섬세하지 못한 성격 탓에 다녔던 동선에 따라 자기 흔적을 남겨 놓곤 했다. 일어나서 물을 한 컵 따라서 반만 마시고는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화장실 앞에서 티셔츠를 벗어 얼굴과 머리에 대충 물칠만 했고, 수건을 목에 걸고 나와서 털다가 서랍장 위에 올려 둔 다음 옷장에서 옷을 껴입고 나갔을 것이다.


P의 어머니는 싱크대 위에 올려진 물컵, 화장실 앞에 떨어진 티셔츠, 서랍장 위에 던져진 젖은 수건과 옷장 앞에 벗어둔 바지를 차례차례 하나씩 주웠다. P의 여동생은 한숨을 푹 쉬며 손을 거들었다. 자기는 혼자서도 잘한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작은 오빠는 이렇게 뒤에서 살뜰히 보살피는 어머니의 손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기가 다닌 동선을 이렇게 알리고 가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작은 오빠가 예뻐서 이렇게 치워주는 게 아니다. 장사 끝내고 지친 엄마가 또 허리를 굽히는 게 싫어서 그렇다.


옷을 줍고 나니 책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상이 보였다. 덜 깬 눈으로 전공책을 찾아서 책상 여기저기를 뒤졌던 모양이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는데 알아서 정리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그냥 옆으로 밀어 두기만 했다. 그때 종잇장들 사이에서 꼬깃꼬깃한 갱지 한 장이 보였다. '대학 연맹 산악회원 비상연락망' 등산을 하다 사고라도 나면 집에 전화를 해줘야 하니 모아 놓은 전화번호들인가 보다.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반으로 접던 어머니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그카고 보니께 그 아가씨가 산악회 후배라고 했제?

L은 하루 종일 심란해서 수업이 눈에 안 들어왔다.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크로키 과제도 있어서 얼른 작업도 해야 하는데, 이젤 앞에 앉아서 연필만 깎아 대고 있다. L이 깎고 있는 연필은 뾰족해지다 못해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휴... 기말 과제 작업도 해야 하는데 이번엔 주제를 뭘로 하지? 근데 P어머니가 내 전화는 어떻게 아셨지? 아니, 됐어. 그냥 모른 척하지 뭐. 이번엔 가족을 소재로 그릴까... 근데 어른 전화라 무시하긴 신경 쓰이네... 아니, 그 사람은 할 말 있으면 직접 와서 할 것이지! 남자가 강단이 없어... 기말 과제 빨리 해야 하는데, 크로키 언제 다 그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왜 괜히 전화를 받아가지고! 그냥 어제 집에 없다고 할 걸...

크로키는 움직이는 물체를 순간적으로 캐치해서 빠른 시간 안에 특징을 잡아내는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려면 대단히 집중할 필요가 있지만, L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과제실에 모인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모델을 해주기로 했다. 동기들이 모여 누가 먼저 모델로 올라갈지 웅성거리는 중에도 L은 멍하니 연필만 깎아 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L의 어깨를 툭 밀었다.

야 너 뭐해?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뭐... 아무것도 아니야
너 안 그릴 거면 모델이나 해.
아 싫어.
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모델하냐! 짧은 키로 모델 데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아 진짜 싫다니까? 난 앞에 서는 거 싫다고!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L이 모델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꾸역꾸역 책상 위에 올라가는 L의 얼굴에 잔뜩 심술이 났다. 작업실 가운데 책상 위에 모델이 앉으면 친구들이 빙 둘러앉아 이젤에 크로키를 그려야 한다. 처음엔 30분 다음엔 15분 그다음은 10분, 5분, 3분 간격으로 점점 시간을 짧게 주고, 모델은 그때마다 포즈를 바꿔줘야 한다. 전문 모델은 척척 포즈를 잡아주지만 보통 학생들은 모델이라고 괜히 긴장해서 앉은 모습이든 선 모습이든 다 어색하기만 했다.

야야, 짧뚱한 다리 좀 꼬아봐!
짧아서 안 꼬아진다 왜!

앙칼진 L의 고함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진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L은 책상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앉아 어제의 전화 통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요새 자꾸 술 먹고 늦게 오고 가방도 이자뿌고 오고 그카는게 아가씨 때문인 거 같은데. 거 둘이 헤어졌나? 와, 무슨 이윤지는 내 모르겠는데. 우리 아가 어렸을 때 아버지 가시고 많이 힘들어했다 아이가. 갸가 알게 모르게 외로움도 마이 탄다. 애들 아빠가 특히 고놈 둘째를 싸고돌았다 안 카나. 그른 기 아부지 갑자기 가셨다 카이 을매나 속상했겠노. 내는 마 갸만 보면 항시 맴이 쓰인대이. 내 뭐 이런 말하긴 좀 뭣한데. 내를 봐서 아가씨가 불쌍한 우리 아, 한번만 더 만나주믄 안 되겠나?

태생이 동정심이 많은 L은 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일렁이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는 몰랐지...'


물론 우리 할머니가 원체 과장이 심하다는 건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다. 그러나 그땐 이미 낙장불입, 한번 둔 수는 무를 수 없는 법이다.


30분 지났어. 자세 바꿔.

의자에 앉아 있던 L은 일어서서 한쪽 다리를 의자에 척 올리고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갑자기 과감해진 포즈에 오오오 하는 환호가 들렸지만 L은 여전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번 내가 다가갔으면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때는 내가 먼저 고백까지 했는데,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전화 한 통 받았다고 쪼르르 가는 게 말이 돼?
15분 지났어.

이번에는 바닥에 길게 옆으로 누워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위로 길게 크로키를 그리다가 갑자기 가로로 길게 그려야 되니 모두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야! 갑자기 어려운 포즈 하지 마!
몰라, 모델 마음대로 하는 거야!
자기 엄마가 전화까지 하게 만들다니 무슨 마마보이냐고. 내가 이번에도 먼저 연락하면 여기서 완전히 주도권 뺏기겠지?
10분 지났어. 야 쉬운 포즈 좀 잡아봐.

L은 아예 대자로 누워 손을 머리 뒤로 받쳤다. 무릎은 세우고 다리를 올려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얹어뒀다.

야, 5분 만에 그걸 어떻게 그려!

천장을 누워 발을 까딱까딱. 친구들의 원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L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면 계속 끌려다니는 연애를 할 수밖에 없다. '근데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이번에는 P가 나한테 먼저 연락 오게 만들 거야.' 툭툭 옷을 털고 책상에서 내려가는 L의 눈빛에 포커게임에서 패를 잡은 승부사의 눈빛이 겹쳤다.

어디 누가 먼저 연락하는지 두고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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