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의 기록 Day2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한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함수의 개념을 고안해 냈다. 데카르트는 몸이 허약해서 병상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는데 어느 날 천장에 붙은 파리를 보고 '어떻게 하면 저 파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혼자만의 엉뚱한 상상을 즐기던 데카르트는 격자무늬가 그려진 천장을 보고 종이에 점과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은 파리의 위치, 가로선과 세로선은 좌표평면의 가로축과 세로축이 되었다. 이후 좌표평면의 발견이 음수의 개념을 정립하고 함수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수포자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가만히 누워 있는다고 해서 좌표평면을 고안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침대 옆에는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가 걸려 있다. 서울에서 열린 게티 이미지 전시를 보러 갔다가 구매한 조각보인데 침대 옆 장식으로 붙여 두었다. 난 인생에서 많은 직업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살아갈 테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예술가로 살고 싶다. 왜 지금 당장 예술가가 되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예술가로 살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라 그렇다고 답해야겠다. 아무튼 정기 구독하는 예술잡지와 가끔 그리는 스케치, 챙겨보는 전시회 같은 것들로 아슬아슬하게 열정을 연명하고 있다.
얼마 전 어머니와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를 찾았다. 어머니는 서양미술을 전공하셨고 내가 어릴 때부터 직접 그림을 가르쳐 주셨다. 재능은 핏줄로 물려받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나의 미미한 재주는 어머니의 유전자에서 온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나는 다른 취향과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가끔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둘의 취향 차이가 극명하게 다르다. 어머니가 감탄하는 작품에는 내가 갸우뚱하고 내가 감탄하는 작품에는 어머니가 무심히 지나친다.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두 사람이 동시에 감동을 받는 작품이 있긴 하다.
유영국 작가의 <작품>은 유화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그림의 옆에는 작가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산속에 들어가 산을 못 보고 내려오듯이, 산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다. 산을 내려와서야 비로소 원거리의 산이 보이듯이, 멀리서 바라봐야만 산을 그릴 수 있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유영국, 절대와 자유』(미술문화, 2016)
어머니는 그림 앞에서, 나는 이 글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추상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는 뜻이다. 산에서는 산을 그릴 수 없고 산에서 파악한 특징과 속성에서 공통점만을 추출하여 내면의 산을 그리는 것이 작가의 추상화인 셈이다. 순간의 인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가 되었겠지만 작가는 자기 안의 산을 간결한 선과 면으로 추출해내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에는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 살아봐야 삶이 무엇인지 안다. 작고 사소한 일들은 지워지고 남기고 싶은 중요한 사건들의 개요를 추출(抽象)하여 일정한 이야기로 다듬어야 삶이 기억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끝에는 반드시 짧은 이야기로 남게 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경험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험을 겪고 있는 와중에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 경험을 지나고 복잡한 감정이 정리되고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재구성되어 하나의 추상(抽象)이 되어야 의미가 드러난다.
매일을 살아가면 눈 깜박할 새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그러다 한 해가 지나가 버린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한 편의 글로 기록하면서 나는 매일을 추상(抽象)한다. 내 사고 작용은 필연적으로 과거를 향한다. 과거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잘라내고 감각정보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으면서 의미를 구한다. 그렇게 내가 경험한 '내 안의 삶'을 기록하여 남기는 것이 나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만히 누워서 스마트폰을 봐도 그다지 쓸모없는 정보들만 넘쳐난다. 이태원 참사에서 살아남은 한 학생은 친구들이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과 악플로 인한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유튜브 영상의 댓글에는 소모적인 말싸움과 혐오가 넘쳐난다. 보면 볼수록 정신적인 피로만 쌓인다. 아무래도 세종대왕님이 너무 한글을 쉽게 만들어 주신 게 문제다. 돼먹지도 않은 인간들이 함부로 의견 같은 것을 남기에 되어 모두에게 피로함만 가중시킨다. 허접하게 만들어진 영화를 리뷰하는 산만한 영상, 보기만 해도 부대끼는 음식들을 밀어 넣는 먹방, 끔찍한 범죄 기사들과 무능한 정치인들의 기사. 이 모든 것들을 피해 혼자만의 사유에 빠져 내린 결론은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답답한 속을 게워내듯 머리를 비우고 이제는 자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