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접속의 시대에서 침몰하는 개인 (1)
2018년에 개간한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Vol.1의 주제는 '너무 많은 접속의 시대'이다. 이 잡지는 1년에 4번 발행하는 계간지이고, 우리의 생활에 밀착한 철학적 사유를 쉽게 풀어주는 잡지다. 첫 번째 잡지는 소통, 소문, 미디어와 페이크뉴스 등을 주제로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운 좋게 첫 번째 잡지를 사서 소장 중이고 그중 공감이 될 만한 글 몇 가지를 들어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파란 글자는 인용, 검은 글자는 제 생각입니다.)
하나. 너무 많은 소통 - 니콜라스 카
잘못된 정보와 정치 선전에 민감해지고,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대화가 빈약해지고 무신경해지고, 이성이 아닌 감정 위주의 대화로 후퇴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가 정보 과부하로 인해 조용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우리의 능력이 치르는 대가인 셈이다.
→이 문장은 2018년에 쓰였다. 2023년 지금은 이때보다 더 심하게, 지나칠 정도로 많은 소통 속에서 살아간다. 인터넷 뉴스뿐만 아니라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에도 잘못된 정보가 많다. 댓글창에는 글의 맥락이나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 넘친다.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토론은 없고 비이성적인 공감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금방 휘발되고 마는 가벼운 감성팔이 영상들이 인기를 끈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나 깊이 고민해 볼 문젯거리들은 금방 가볍고 자극적인 다른 문제들에 밀려 사라진다. 요즘 매일 생각한다. '뭔가 중요한 게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둘. 우리는 결국 만나지 못했다 - 김민섭
타인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은 우리에게 안도와 위안을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다.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모바일 기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놓인다. 사실 이것은 '휴대폰 중독'이라기보다는 '접속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본질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화장실에 갈 때 반드시 핸드폰을 챙긴다. 신호등 초록불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인터넷 뉴스를 읽는다. 잠을 잘 때도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잠든다. 밥을 먹기 전에는 밥을 먹으면서 볼 영상을 찾는다.
얼마 전 스마트폰이 고장 났을 때는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자유와 불안. 나를 찾는 누군가에게 응답하지 않을 적당한 명분이 생겼다. 동시에 내가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가져온다. 오래 참지 못하고 새 스마트폰을 받았고 다시 인터넷 세상에 접속했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 쌓여있는 카톡메시지가 보였다. 다시 침묵할 자유가 그리워졌다.
셋. 소음의 시대, 침묵의 미덕 - 마리나 벤저민
21세기는 통신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언제든 연락이 닿아야 하고, 어떤 형태로든 끝없이 정보 교환에 참여해야 하고, 쉼 없는 재잘거림 가운데 자신이 맡은 몫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신념을 소중히 받든다. 무의미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넘쳐나는 한낱 소음이 아니라 도덕적 선인 양 여긴다. 바야흐로 휴대폰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되었다.
→연인 사이에도 '연락 빈도수'라는 단어로 관심과 애정을 수치화해서 표현한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 양과 상대가 보내는 메시지 양을 비교하여 누가 더 많은 애정을 표현하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어차피 카톡이 없던 자리에는 삐삐나 전화, 편지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로는 도무지 변명할 거리가 없다. 잠시라도 연락이 끊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매일 똑같은 안부와 무의미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연애의 의무가 되었다. '잠들었다'는 말로, '바쁘다'는 말로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면 인스타그램의 활동 중 표시를 읽고 추궁하거나, 애정이 식었다며 비난받기 일쑤다. 연애라는 관계에서 혼자만의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이별'이 된다.
넷. 나에게 집중할 권리 - 올리버 버크먼
늘 용량이 모자라는 메일 사서함과 받는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밀고 들어오는 각종 공지와 광고들 사이에서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진짜 원인은 우리와 소통하려는 시도가 너무 많아서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아우성치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만약 시골길의 나무꼭대기에서 앉은 새들이 당신에게 물건을 팔거나 뉴스 속보를 전하거나 별로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면서 웃기려고 한다면 그 산책은 썩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인터넷 세상에는 자극적이고 가벼운 콘텐츠가 끊임없이 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먹는 음식으로 비교한다면, 나는 얼마나 쓰레기 같은 정보들을 보고 뇌 속에 밀어 넣고 있는가. 굉장히 중요한 척하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대부분은 진실하지도 않고, 쓸모 있지도 않고, 깊이 고민해 볼 가치도 없는 정보들이다.
이 자극적인 영상들과 뉴스거리들에 밀려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밀려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일, 나의 야망,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것, 남들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 타인의 야망,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에 지워진다.
다섯. 페이크 뉴스- 톰 챗필드
데닛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하는 경향을 이르는 "악질적 확증 편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악질적 확증 편향은 현재 우리의 믿음과 이론에 긍정적인 증거는 강조하고 부정적인 증거는 무시하는 우리의 성향이다. 인간의 논리적 오류에 관해 이 같은 패턴과 다른 여러 연구 패턴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가 연마한 기술이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논쟁에서 편을 가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게 쓰인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것이 바로 정치인데, 굳이 증거가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개소리가 태초부터 우리와 함께 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찾기보다 나와 말싸움하는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공부한다. 삶의 진실보다 당장 눈앞의 사소한 전투에서 이기는 일에 급급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시간 낭비가 인터넷에서 댓글로 싸우는 일이지만 이때만큼 눈에 불을 켜고 온갖 기사와 논문을 읽어댈 때가 없다. 그렇게 사람들이 댓글창에서 남과 여, MZ와 꼰대,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문제의 핵심과 진짜 책임자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어차피 곧 다른 자극적인 문제가 터질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은 옮겨갈 것이다. 그때까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자리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태원 참사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던 여론은 곧 잠잠해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자리를 지켰고, 지금 논란 중인 정치인들도 곧 슬그머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정치는 누가 진실한지가 아니라 누가 더 뻔뻔한지를 겨루는 게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