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을 쓰는 이유

당신의 역사를 오랫동안 함께 한 물건이 있나요?

by 구름조각

원래 내 천성이 유행과는 거리가 멀고, 약간 할머니 취향에 가깝다. 겨울이 되면 따끈한 생강차를 마시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소식이 늦는 1인이고, 핸드폰은 고장 날 때까지 쓴다. 새 옷을 사는 것도 1년 중 손에 꼽을 정도이고 작년에는 중고 옷만 여러 벌 구매했다. 예쁜 원피스가 한벌에 3천 원이라기에 대 여섯 장 사서 지난여름 내내 돌려 입었고, 올해도 그렇게 보낼 예정이다. 사람에도 물건에도 한번 정을 주면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타입이다 보니 사소한 것도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둔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친구에게 받은 쪽지나 일기장, 펜촉이 다 닳은 펜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 이런 취향인 내가 만년필이라는 필기구를 쓴다는 건 상당히 개연성 있는 일이다.


다만 난 값비싼 한정품을 모으기 위해 발품을 파는 대단한 수집가도 아니고, 만년필 브랜드 별로 특성을 외우는 덕후도 아니고, 만년필을 꼼꼼하게 관리해가며 애지중지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충동적으로 산 라미사의 민트색 만년필을 5년째 쓰고 있을 뿐이다. 잉크가 다 떨어지면 채워 쓸 뿐이지 별다른 관리는 안 한다. 사고 나서 한 번도 세척을 한 적도 없고 책상에 굴러 다니게 두다가 그저 일기나 아이디어 같은 것을 휘갈기는 용도로 쓸 뿐이다. 난 만년필이 대단히 낭만적이게 보이거나 멋져서 쓰는 게 아니고, 순전히 만년필이 만만한 필기구 여서 사용할 뿐이다. 잉크만 계속 충전하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일 없이 계속 쓸 수 있고, 잘 길들이면 그 나름 내 손에 착 감기는 편함이 있다.


오히려 만년필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필기구이다. 카트리지 형식의 잉크 교체를 하는 중에 매번 손에 잉크가 묻기 십상이다. 만년필 잉크가 새기라도 하면 종이 수십 장이나 가방 안감이 물드는 일도 허다하다. 수성의 잉크는 손의 땀이나 물에 쉽게 번지고, 종이가 얇으면 뒷장까지 스며들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저렴한 보급용이 아니면 일반적인 볼펜에 비해 가격대가 꽤 비싸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고 살짝 기울어진 상태에서는 잉크가 원활하게 흘러나오지 않기도 해서 항상 바른 자세로 앉아 종이를 책상 위에 잘 펼쳐두고 써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만년필을 계속 애용하는 이유는 만년필로 쓴 글에는 나의 감정이 잘 담기기 때문이다. 꾹꾹 눌러쓰지 않아도 잉크가 잘 나오는 덕에 생각의 속도만큼 빠르게 손으로 휘갈겨 쓰기에도 편리하다. 화가 났을 때는 그 감정 그대로 날카롭고 잔뜩 성난 글씨체가 종이에 남고, 단호한 의지가 느껴질 때는 글씨도 네모칸 반듯하게 채운 것처럼 남는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만년필로 일기를 쓰면 글씨체도 괴발새발 혼란하다. 슬플 때 쓴 글에는 눈물 자국이 번진 잉크로 그때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다른 볼펜들에는 이런 차이가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직 만년필만이 이렇게 뚜렷하게 그 순간의 기분을 남겨주기 때문에 만년필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만년필이 내가 미처 텍스트로 남기지 못하는 섬세한 나의 감정까지 읽어내어 글씨체와 잉크의 번짐으로 남겨두는 것 같다.


수없이 쏟아지는 물건과 현란한 광고들은 매번 새롭고 놀라운 기분을 준다. 특히 나처럼 유행에서 한 발짝 물러난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나 놀랍고, 언제 이런 신박한 기술이 나타났나 놀랍다. 그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살이에 휘청 균형을 잃고 휩쓸리면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다. 그럴 때 나에게 균형 감각을 주는 것이 이런 오래 묵은 나의 물건들이다. 나와 역사를 함께하며 손때를 탄 물건으로 내 과거와 정체성을 환기한다. '그래. 나는 이런 물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이렇게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아끼는 사람이었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보면 화려한 광고 속 신제품에도 조금은 쿨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낯설고 좋아 보이는 것들의 유혹을 익숙하고 친근한 내 것으로 이겨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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