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afe 9 Roo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조각 May 25. 2023

아늑한 공간, 프레스카 29

서울 카페 여행(6) 도곡동 프레스카 29

 아무리 맛있는 커피라도 계속 마시다 보면 무뎌집니다. 감각적 자극에는 늘 역치라는 것이 존재하니까요. 아무리 맛있는 스테이크도 배가 부르면 질긴 고무를 씹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간 브런치에 연재한 글을 돌아보면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모든 소재를 가지고 글을 써왔습니다. 문학, 음악, 음식, 커피, 영화, 사랑, 예술에 관한 글이었어요. 이것들은 인간의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자극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감각적 자극에 대해 사람들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저의 즐거움이죠.


 그런데도 가끔은 이 모든 자극들이 버거워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카페인도, 달콤한 설탕도, 묵직한 크림도 다 싫어져서 그만 깨끗한 물이나 한잔 마시고 싶죠. 대중교통으로 경기도와 서울을 오고 가는 여정이 피로했나 봅니다. 잠깐 쉬어야 할 때가 온 거지요.  

아늑한 공간, 프레스카 29

주소 : 서울 강남구 논현로 28길 29 토펙빌딩

*인스타그램이나 홈페이지 정보가 없습니다.


1. 역사와 블루리본

 프레스카 29는 2009년에 개업한 로스터리 카페로 도곡동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입니다. 그 긴 시간을 살아남은 동안 블루리본 스티커도 8개나 받았네요. 블루리본은 국내 맛집 가이드로 미슐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물론 그 위상이나 신뢰도는 다를 수 있지만, 일반인과 음식 전문 평론가들이 맛집을 평가하여 블루리본을 1~3개 수여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빠르게 유행이 변하고 수많은 맛집들이 반짝 인기를 끌다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13년이 넘는 시간을 견딘 카페가 대단해 보이네요. 나침반과 배, 세계지도 같이 항해를 콘셉트로 잡은 내부 인테리어도 조금 올드한 듯 하지만 동시에 역사가 느껴집니다.

2. 로스터리와 한잔의 커피

 프레스카는 스페인어로 신선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선한 생두를 이용해서 로스팅한 커피를 판매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산지에서 생산된 지 1년 미만의 생두를 뉴 크롭(New Crop)이라고 합니다. 1년 이상 2년 미만은 패스트 크롭(Past Crop) 혹은 커런트 크롭(Current Crop)이라고 부릅니다. 2년이 넘어가면 올드 크롭(Old Crop)이 되는데 건초나 볏짚 향이 나고 상품 가치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죠.


 햇감자, 햅쌀이 맛있듯이 커피콩도 햇생두가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로스팅한 후 커피를 만들어도 향이 풍부하고 신선한 느낌이 들어요. 프레스카 29의 가장 큰 장점은 신선한 생두로 로스팅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유행이 빨리 변해도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는 소비자를 꽉 잡아놓을 수 있다는 뜻이겠죠.

3. 자몽과 커피의 조화, 루비선셋

 이곳의 시그니처라는 루비선셋을 디카페인으로 주문했습니다. 자몽청과 우유, 커피, 크림을 조합한 음료입니다. 마셔보니 직접 만들었다는 자몽청에는 시고 떫은맛이 거의 없었어요. 달콤한 자몽소스에 쌉싸름한 커피맛의 조화가 느껴집니다. 휘핑크림은 달고 부드러워서 디저트 같은 커피 메뉴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날 벌써 3번째 커피여서 끝까지 마시지는 못했습니다. 앞으로 카페 투어를 가거나 평가를 내릴 때는 하루에 2곳을 넘지 않도록 규칙을 만들어야겠어요.

4.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다른 어떤 곳보다 프레스카 29의 분위기가 가장 아늑했던 것 같아요. 약간 어두운 간접 조명과 푹신한 의자, 사장님이 보셨던 것 같은 커피 관련 책과 만화책, 모카포트와 더치커피 용품들, 약간 어지럽게 쌓아 놓은 생두 봉지 같은 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1시간 정도 앉아서 다른 손님들을 둘러봤어요. 앉은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시고,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는 분도 계시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분도 계시고요.


 '내가 아는 카페는 이런 모습이었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화려하고 세련되고 신기한 메뉴가 있는 카페도 좋지만 제가 알고 있던 카페는 이렇게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었어요. 언제든지 와서 맛있는 커피 한잔과 책을 보든, 일을 하든 짧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면서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는 그런 카페. 늘 분주하고 모든 것들이 변하는 서울에 귀중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담이지만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것도 왠지 멋있지 않나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느낌입니다. 이것이 너무 많은 카페와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친 여행자를 위로해 주네요.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오후 6시쯤 카페를 나와 매봉역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르르 사람들이 뛰어가는 것을 보고 근처에 행사라도 있나 했지요. 퇴근길 지하철로 뛰어가는 사람들이란 걸 깨닫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어쩌겠어요. 배낭 메고 열심히 뛰었죠. 이 시골쥐의 서울여행기... 쉽지 않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허니와 애크로매틱 커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