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afe 9 Roo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조각 May 22. 2023

새벽 두 시, 이태원 거리

서울 여행기(3) 예술가의 시선


 커피 공부를 하면 이게 문제입니다. 카페인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예요. 이태원 게스트 하우스의 싱글 매트리스는 불편하고, 이불과 베개는 눅눅합니다. 피로에 지친 외국인 여행자의 코골이가 점점 커지네요. 결국 비틀대며 이층 침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조용한 노래를 들어도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아직 쓰지 못한 에너지가 남은 것 같아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새벽 1시 42분. 아직 이태원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회를 보고 왔습니다. 평일 오후에도 사람이 참 많더군요. 그가 그린 도시 풍경을 보면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도시라기 보단 어쩐지 스산하고 외로운 정서가 느껴집니다. 


 어떤 이는 에드워드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라고 하지만, 그의 작품은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거나 우리가 외면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굉장히 내면적인 작가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심상을 화폭에 드러냅니다. 극장에서도 화려한 공연의 장면을 그리기보다 연극이 끝난 후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뉴욕의 마천루를 그리기보다 열린 창문 안에 혼자 있는 여성을 그립니다. 화려한 파리의 밤거리보다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피에로를 그립니다. 그것은 작가가 그런 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이죠.


 외롭고, 쓸쓸하고, 비밀스러우며, 단절되고, 스산하고, 적막한 도시의 풍경들.

 

 예술가의 시선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이태원의 밤거리를 서성였습니다. 누군가가 '밤에 하는 산책은 누구든지 철학자로 만들어 준다'라고 하더군요.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비치는 도시의 밤은 낯설고 긴장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늦은 밤에 대학가 술집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시끄럽고 좁은 술집이나 클럽에 가는 건 싫어하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대학가의 밤 풍경은 꽤 재밌는 구경거리입니다.


 방탕한 자유, 묘하게 들뜬 분위기, 휘청이는 여자, 크게 소리 지르는 남자들 사이로 걸어가면 눈먼 자들의 도시에 혼자 또렷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내면은 차분하고 깊이 가라앉아 있지만 외부세계는 시끌벅적하고 위태로워요. 그 안에서 군중 속의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과 ‘나’. 우리는 섞이지 않고 나의 존재는 한 발짝 밖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거죠.  


 낯선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평소보다 더 자유롭고 들뜬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태원 밤거리는 적막하고 서늘합니다.

 한 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술집들이 텅 비어 있는 풍경을 보면 마음 한편이 쓸쓸합니다. 몰락한 제국의 잔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한때의 영광과 번영이 과거의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슬픔 같은 거요. 물론 다른 날 다른 때에 가면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곳의 이방인이니까요. 그저 잠들지 못한 제 마음이 이렇게 어지러웠고 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사진으로 찍은 것뿐입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잠들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많아서 그렇겠죠. 새벽 공기를 맡고 이태원을 거닐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갔습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 매트리스에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몸속에서 웅-웅-돌아가는 에너지 발전소 전원이 꺼지는 것 같네요. 이제는 잠에 들 시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덕후들의 성지, 오버나잇 커피로스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